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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5월 18일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이면서 무엇보다 뜨거운 사회운동가이던 존 버거는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많은 책을 남겼다. 그리고 구순의 나이로 작년에 타계했다. 비록 긴 세월을 살아주었지만, 흠모하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사실에서는 큰 상실감이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허전한 마음으로 그의 산문집들을 다시 찾아 읽었는데 그러다 우연히 2015년 무렵 그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제목은 <존 버거의 사계>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지금도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 90여 분 영화 중에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다. 영화의 끝 부분에 나온, 어쩌면 매우 평범한 장면이다. 존 버거가 대화 친구이자 이 영화를 제작한 틸다 스윈튼의 자녀에게 오토바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타본 적 없는 어린 친구에게 건네는 그의 조언은 간결하다. 몸에서 힘을 빼고 편하게 앉아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볼' 때 몸은 자신의 전체를 끌고 그쪽으로 기운다. 그가 알려주고자 했던 오토바이 조정하는 원리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신선한 '강습'을 듣고 나니 새삼 '바라본다'는 행위에 각별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이나 바라볼 수 없다. 나는 바라보는 쪽으로 기울 테니까.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의 글들은 모두 글자로 기록한 스냅사진들 같다. 존 버거는 여기에 포토카피(글로 쓴 사진, Photocopies)라는 이름을 붙인다. 총 스물아홉 편. 각각의 짧은 글들은 모두 누군가들의 한순간을 글로 '포착'하고 있다. 존 버거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누군가에 기운다. 그 대상은 때로는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때로는 세상에 알려진 어느 인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통성명도 없이 스쳐지나간 누군가들이다. 라코스테 스웨터를 입은 남자,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샤프카를 쓴 젊은 여인, 거리의 배우 등등. 때로 그가 바라보고 기록하는 대상은 풀밭 위의 그림, 잔에 담긴 꽃 한 묶음, 바구니 안의 고양이 두 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 기록들은 마치 셔터스피드를 길게 설정해 찍은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대상인 인물들은 찰나이되 느리게 흐른 찰나에 담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 포토카피들의 목적은 인물을 정확히 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목적일까. '내가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중략) 나는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정확을 떠나서 대상을 향해 질문을 하는 것, 그러면서 대상에 머무는 신비로움을 어루만지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누구나에게 머무는 신비로움. 하지만 금방 고개를 돌려버릴 때는 알아내지 못할 신비를 오래 바라보며 따라 그리는 작업. 이것이 존 버거가 시도하는 포토카피라는 생각이 든다.

  • 2018년 3월 30일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지음


이십여 년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떠나와 자취를 시작했는데, 집에서 받는 용돈 조금과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번 돈을 합쳐도 생활비가 항상 부족했다. 두 다리를 죽 펴고 눕지도 못하는 고시원 방에 살았는데 그 방 하나의 월세가 당시 16만 원이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이 10만 원,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이 30만 원. 총 40만 원 수입 중 4할이 집세였던 셈이다. 그때 '돈을 얼마나 벌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자주 했다. 이십 대 중반,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조금 나은 집을 구해서 살기 시작했다. 다세대 주택의 옥탑이었는데 보증금 500에 월 30이 집세였다. 작은 출판사에 들어간 내가 받은 초봉이 월 100만 원 남짓. 이제 집세 비중이 3할 정도로 내려가기는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돈 쓸 곳도 늘었다. 밖에서 밥 사먹을 일도 많고, 옷도 몇 벌은 갖춰야 하고, 이따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마음속에만 저장해뒀던 쇼핑 목록의 물건을 지르기도 하고. 집세와 카드 값이 스쳐지나가고 나면 또다시 궁핍을 마주했다. 꼬박꼬박 돈을 벌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든 걸 알았다. 그럼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벌어들여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돈 걱정과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을 떨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제목에 적힌 '자급의 삶'이라는 말이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혹시 자급에 성공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이 책은 '자급 관점'에 대한 책이다. 기존에 우리가 살림살이를 생각할 때 흔히 '돈'의 관점, 즉 소비 생활을 영위하는 수입의 관점에서 바라봤다면, 이 책은 이를 돌이켜 '자급'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라고 권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얼마나 벌고 있는가' 같은 기준이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의 필요를 제 힘으로 마련해나가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삶의 문제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관점을 바꿔서 따져보면 여러 문제들이 새로 보이게 된다. 먼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를 물어보자. 문명화일까? 지식의 향상일까? 기술의 발달일까? 저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은 '착취'라고 말한다. 가정의 여성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고, 제3세계를 착취한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소위 '발전'을 거두었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지음'가정의 여성을 착취'한다는 것을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 노동자와 가사 노동자를 분업화했고, 가부장적 논리와 다름없는 논리로 임금 노동자의 자리를 주로 남성들이 차지하게 했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가정 일을 도맡으며 남성 임금 노동자를 보조하는 역할에 묶여 '착취'당한다. 이때 여성은 마치 '자연 자원'처럼, '무제한적'으로 착취당한다고 저자들은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는 단선적 착취로 그치지 않는다. 남녀불문 산업화된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때로 제1세계 여성이 제3세계 여성을 착취하는 일도 일어난다. 자본주의 체제의 회로가 폭력적인 구조로 돼 있는 탓이다. 누군가 무언가를 얻을 때 시소의 저편에 있는 누군가는 꼭 무언가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 구조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정점에는 바로 전쟁이 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자본주의 발전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대규모 전쟁을 통해 몸집을 불려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의 질문, '자급의 삶이 정말 가능한가?', '자급에 성공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자급의 가치와 자급의 필요를 일깨운다. 자급은 누군가를 착취하는 폭력에서 멀어지려는 실천이다. 실천이란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자급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훨씬 풍요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저자들은 책 속의 여러 사례들로써 설득한다. 그러니 의지를 '돈벌이'에서 '자급' 쪽으로 조금씩 틀다 보면 언젠가는 자급의 삶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급에 성공하면 과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책 어딘가에서 '삶에서 해방되려 하지 말고, 삶을 해방으로 만들라'는 요지로 말한 바 있다. 아마도 가난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듯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가난을 즐겁고 풍요로운 것으로 만들라고 말이다. 자급 관점에 따르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더 많은 돈'이 아닌 '돈에서 해방되어 자급의 길을 마련하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1.

요새 들어 새삼 고민하는 것이 있다. 소위 ‘DIY 책 디자인’과 관련한 고민이다. 고민이라고까지 할 일은 아닌지도 모르나 종종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생기다 보니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에 앞서, 먼저 DIY 책 디자인이라는 생소한 말의 의도부터 해명해야 할 듯하다. 목공, 인테리어 등의 DIY 분야처럼 책 디자인에 DIY 분야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새 위기라고 할 만큼 매출이 나빠지면서 작은 출판사의 대표자가 편집은 물론 책 디자인까지 도맡아 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이를 두고 누군가는 ‘DIY 책 디자인’이라고 부르더라는 말이다.

하나 먼저 짚을 것은, 디자이너가 아닌데도 디자인을 하는 이유로 경제적 이유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좋아서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 편집을 편집자만 하고 영업을 영업자만 하라는 법이 없듯 디자인도 디자이너만 하라는 법은 없다. 평소 책 디자인에 큰 관심을 지녀온 이가 어느 날 팔을 걷어 올리고 그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문제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매출 부진의 어려움 탓에 궁여지책으로 책 디자인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마추어의 한계를 지녔지만 그래도 직접 해보는 데 만족하는 이들의 가상한 시도 정도로 생각하면 그만일까?

궁여지책으로 책을 디자인하는 경우의 예로 다시 초점을 맞춰보자. 궁여지책이라지만 이것은 자구책이다. 펴낼 원고는 있는데 자금이 없을 때 출판 계획을 접기보다는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방도를 찾는 모습에는 박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구책이 언제까지 자구책이 될 수 있을지가 우려된다. 나는 이러한 자구책을 지원할 사회적·문화적 배경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2.

얼마 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의 요청으로 나무를 사다가 침대를 하나 만들었다. 목공을 해본 적이 없어서 필수 도구와 재료를 갖추는 것부터 나름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기본적인 제작법을 더듬더듬이나마 익히려고 책과 동영상을 찾아봤다. 어설프다는 소리를 들어가며 가까스로 침대를 만들어내기는 했다. 비록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지는 못했지만 어찌어찌 해냈다는 뿌듯함은 상당히 컸다. 연장도 몇 개 갖춘 김에 몇 가지 가구를 더 만들어볼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관련 책이나 동영상을 꾸준히 찾아보는 일로 이어졌다.

그러면서 접한 자료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남자들의 헛간(Men’s Shed)‘이라는 단체에 조합원으로 소속된 노인들이 소박한 형태의 가구를 만드는 장면을 담은 유튜브 영상이었다. ‘남자들의 헛간’은 노인들 특히 노후 생활이 어려운 남성 노인들에게 소일거리로 목공 기회를 제공하는 비영리단체였다. 단체는 목공이 가능한 헛간을 물색해 마을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건강상의 이유로든 개인적인 상황 탓으로든 고립감을 겪는 노인들이 이곳을 찾도록 주선한다. 노인들은 서로 간에 도움을 주고받으며 헛간에 구비된 나무 재료를 이용해 마을에 필요한 시설을 만들거나 때때로 마을 사람이 요청하는 소소한 가구들을 제작해서 선사한다. 이를 통해 노인들은 마을 안에서 건강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실제로 신체 건강도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 단체가 말하는 효과였다. 내가 이 단체에 대해 기억하는 까닭은 소개하고 있는 단체의 뜻이 근사하기도 하지만, 영상에서 본 목공 활동 중인 조합원들의 표정이 기억에 남을 만큼 환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한길사)에서 읽은 어느 대목이다. 목공에 도움을 얻고자 이 책을 펼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책 덕분에 이와 관련해서 곱씹을 생각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책에는 브리콜뢰르(bricoleur)라는 말이 나온다. 브리콜뢰르는 아무것이나 주어진 도구를 써서 손수 만드는 사람, 최대한 있는 걸 활용하면서 뭐라도 쓸모 있는 걸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브리콜뢰르는 장인(匠人)이 아니다. 한길사의 번역본에서는 이 말을 ‘손재주꾼’이라고 옮긴다.

레비스트로스가 브리콜뢰르를 언급하는 것은 엔지니어, 즉 과학자 유형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엔지니어는 근대과학의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형으로, 레비스트로스는 둘의 차이를 이렇게 부연하기도 한다. “문명의 특정 상황에 의한 구속에 부딪쳤을 때 엔지니어는 항상 통로를 뚫어 ‘건너편’에 도달하려고”(73쪽) 애쓴다. 반면 “‘손재주꾼’은 그것이 좋아서든 할 수 없어서든 ‘이편’에 머물고 만다.”(같은 쪽)

레비스트로스가 브리콜뢰르를 예로 들어 말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흔히들 엔지니어의 일이 브리콜뢰르의 일보다 더 과학적이거나 첨단이라고 여기는데 이러한 통념은 잘못되었고 기실 브리콜뢰르와 엔지니어의 일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말이다. 둘 모두 일반화 능력을 가지고 과학성을 구현하며 가치상 동일하다. 그러므로 브리콜뢰르의 일이 엔지니어의 일과 비교해 ‘미개’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는, 엔지니어(과학자)는 “구조를 이용해서 사건을 만드는 데 비해” 브리콜뢰르(손재주꾼)는 “일어난 사건을 이용해서 구조를 만드는 것”(77쪽)이라고 레비스트로스는 말한다.

이 책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서구 근대의 자민족중심주의 아래에서 미개하고 열등하게 간주돼온 ‘야생의 사고’가 사실 현대과학과 동일선상의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미개사회와 문명사회 간에도 차이가 있다면 ‘뜨겁다’ 혹은 ‘차갑다’처럼 온도차 같은 게 있을 뿐 우열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브리콜뢰르와 엔지니어의 비교하는 대목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엔지니어와 브리콜뢰르의 일에 우열은 없다. 다만 ‘건너편/이편’, ‘뜨겁다/차갑다’ 같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일은, 올 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았던 훈데르트바서 전시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나는 뜻밖에도 어느 사진 하나에 눈길이 갔다. 사진은 집 현관 앞에 앉아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의 훈데르트바서를 담은 평범한 사진이었다. 그런데 그의 뒤로 보이는 집이 이채로웠다. 석회가 발린 집의 벽체에 유리병이 점점이 박혀 있고 지붕에는 풀이 자란 모습이었다. 그가 뉴질랜드에 지은 유리병집(Bottle House)이었다.

훈데르트바서의 유리병집을 보면서 브리콜뢰르라는 말이 다시 떠올랐다. 훈데르트바서의 예술세계가 이 한마디에 담아질 리는 없지만, 연관해서 살펴볼 구석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유리병집의 경이로움을 생각했다. 집이 자연과 관계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지만, ‘아무것이나’ ‘주어진 도구를 써서 손수’ ‘사건을 이용해 구조를 만들며’ ‘좋아서든 할 수 없어서든’ 이뤄가는 형태의 아름다움이 무척 경이로워 보였다.

3.

다시 ‘DIY 책 디자인’을 이야기하며 글을 마칠 차례이다. 나는 이것의 발단이 궁여지책인지를 따지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비록 할 수 없이 디자인을 ‘DIY’로 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하는 작업의 의미가 축소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상황에도 가능성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노먼 포터의 『디자이너란 무엇인가』(작업실유령)의 첫머리에는 이렇게 쓰여 있지 않나.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이다. (…) 행동을 구상하고 나서 실천 수단을 마련하기 전에, 그리고 결과를 가늠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는 활동 영역에는 모두 그들이 있다.”(12쪽)

문화·산업의 주류 제도권 안에서 말해지고 보여지는 ‘디자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띄지 않는 무명의 삶들 속에서도 디자인은 행해진다. 그들이 행하는 여러 ‘만들기’의 차원에도 예술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다. 이에 대한 발견과 주목이 행해지고, 이를 통해 디자인 문화가 더욱 두툼해지면 좋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어쩌다 보니 ‘DIY 책 디자인’이라는 말까지 나왔지만 이는 앞으로의 출판에서 피할 수 없는, 갈수록 더욱 뚜렷해질 경향을 일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산업의 구조가 낡고 잘못된 와중에 시장의 수요가 갈수록 줄어든다면 사정이 나빠지는 이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출판계의 누구라도 아예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성 편집자나 영업자는 물론 기성 디자이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DIY 출판’이 새로운 풍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획, 편집, 디자인, 제작, 홍보를 모두 도맡아야 하는데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DIY라는 말에 걸어보는 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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