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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다니엘 에버릿 지음


이 책은 남미 대륙 아마존 강 유역에 사는 파다한 족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파다한 족은 "지구상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거주지가 외부 세계에서 동떨어진 아마존 유역인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그들의 언어에 있다. 일단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는 외지인이 아무도 없고, 그들 부족민 중에도 외지 언어를 구사하는 이가 없다. 이런 탓에 이들의 문화와 사고방식 등을 이해할 통로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언어는 세상에서 가장 특이하다." 이들의 말은 현존하는 다른 어떠한 말과도 연관성이 없다. 얼핏 들으면 전혀 인간의 말로 들리지 않고 동물 울음소리와 비슷하다.


저자 다니엘 에버릿은 언어학자이며 이 책의 내용을 경험하던 당시에는 기독교 선교사 신분이었다. 그는 파다한 언어를 배운 다음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목적을 갖고 1977년 말에 외지인이 닿기 힘든 땅인 파다한 마을에 처음 찾아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30년 간 아마존 강 유역 곳곳에 퍼져 사는 여러 파다한 마을에서 몇 년씩 거주하며 그들의 삶과 문화를 경험하고 그들만의 언어를 연구했다. 그가 처음 파다한 사람들을 찾아간 목적은 '선교'였으나, 결론적으로 그의 목적은 실패하고 만다. 그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삶에 깊이 빠져들면서 오히려 자신이 종교를 버리고 무신론자로 거듭나게 된다. 아마존 현장 연구가 그의 삶을 바꾼 것이다. 이 책은 그 심경의 변화를 소개한다. 그는 파다한 사람들의 무엇에 감화된 것일까?


저자는 30년의 여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바로 파다한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라고 말한다. 첫 만남부터 이들은 "얼굴마다 웃음이 가득했다." 정글에서의 삶이란 어찌 보면 고난의 연속인데, 그럼에도 이들은 여유를 잃는 법이 없었다. 이를 단순히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라고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들의 문화 전반이 철저히 '현재'를 인식하게끔, 일상의 기쁨에 집중하게끔 수렴돼 있다. 저자는 그들의 언어를 익히기 위해 이 독특한 문화에도 익숙해지려 노력하지만, 근심하고 불안해하는 게 일상인 문화권에서 건너간 저자는 예상을 뛰어넘는 여러 곤란을 겪는다. 그 세세하고 흥미로운 (때로는 가혹한) 우여곡절들이 책 곳곳에서 소개된다.


철저하게 '현재'에 초점을 맞춰 사는 파다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언어를 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파다한 사람들은 직접 경험한 것만을 말하고, 그런 이야기만 믿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경험이 곧 인식이며 세계 자체다. 경험 밖의 영역이나 추상적인 영역은 그들 세상에서는 도외시된다. 이는 아마존 유역에 사는 다른 부족들과도 차별적인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다. 저자의 성경 번역 프로젝트가 실패한 궁극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복음'을 전해주면 이런 식으로 반문한다. '네가 그걸 봤어? 너도 거기에 있었어? 아니라면 우리는 믿을 수 없어.'


파다한 사람들의 철저한 '현재 지향', 그리고 책에서 수시로 묘사되는 그들의 풍요로운 웃음소리는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이 책은 아마존 마을 답사기인 한편 인류학과 언어학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들을 탐구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큰 미덕은 저자의 이야기 솜씨인 것 같다. 파다한 부족에게 큰 애정을 가진 저자는 그 애정만큼이나 생생한 관찰과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우리의 삶이 현재로부터, 그리고 구체적인 경험과 인식으로부터 동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언제든 거듭 펼쳐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자아 연출의 사회학> 어빙 고프먼 지음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 여러 개의 가면을 상황에 따라 바꿔가며 쓴다. 회사에서는 회사생활에, 학교에서는 학교생활에 어울리는 가면을 쓴다. 혼자 거리를 걸으면서도 나름의 가면을 쓴다. 동네잔치에 참가한다면 마주치는 사람과의 관계가 다양하니만큼 보다 여러 개의 가면을 번갈아 쓰게 된다.


이 책 <자아 연출의 사회학>은 미시사회학 분야를 개척한 대가로 평가받는 어빙 고프먼의 책으로, 한국어판의 부제는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는 어떻게 연기하는가'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책을 소개한다. "나는 이 책이 건물이나 공장처럼 물리적으로 한정된 공간 안에서 조직되는 사회생활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는 상세한 안내서가 되기를 바란다. (...) 나는 개인이 일상에서 남들에게 자신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방식, 자신에 대해 남들이 받게 될 인상을 유도하고 통제하는 방식, 남들 앞에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일들을 살펴볼 것이다."


앞서 적은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쓴다'는 것이 책이 전제하는 바다. 사람은 사회적 삶의 일부인 일상에서 시시각각 '자아를 연출'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그 양상을 들여다보는 것이 책의 내용을 이룬다.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것은 우리의 '자아'와 우리가 영위하는 '사회적 삶'에 대한 꽤 색다른 이해다. 특히나 직장이나 공동체 등에서 우리가 나누는 상호작용이란 것도 새로이 생각해보게 된다.


우리는 흔히 '아무 거짓 없는 맨얼굴' 같은 것을 순수 상태로 친다. 그 무엇인 척하지 않고 그저 자신인 채로 교류하는 것을 솔직하고 정직한 것으로 치며 그런 자세를 권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순수 맨얼굴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한다. 맨얼굴 역시 맨얼굴로 연출된 가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낙담할 일일까. 이 책은 반대로 지적한다. 사회적 삶에서는 모두들 역할이 필요하고, 역할은 가면을 쓰는 일에서 비롯한다. 가면은 '가장한다'는 함의 탓에 부정적으로 비춰지지만, 실은 인간 간의 상호작용과 협력을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소다. 가면은 자아의 변질이 아니라 그것이 꼭 필요하기에 존재하는 자연물의 일종일 뿐이다.


오히려 가면을 쓰지 않는 의사소통이 폐단을 일으키기 쉽다. 우연한 기회에 아빠의 직장에 놀러간 천진난만한 꼬마를 상상해보자. 두꺼운 안경을 쓰고 배가 볼록 나온, 아빠가 평소에 무심결에 묘사하던 외양의 어떤 남자가 모습을 보이자 꼬마가 외친다. "아빠 저 사람이 그 '사장놈'이야?" 사회적 역할을 전연 의식하지 않는 순진무구한 자아는 이럴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라는 무대에서 자아를 연출한다는 점은, 일상생활을 '연극'처럼 바라볼 수 있다는 단서를 준다. 실제 이 책은 그렇게 연극 공연의 관점을 통해, 연극 형식에서 도출한 원리를 통해, 일상이라는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의 동태를 들여다본다. 그러나 이 책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온 세상은 다 연극이다'는 차원은 아니다. 고프먼은 사회와 자아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통해 사회생활의 '진짜' 구조를 살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말미에 실린 추천사에는 이런 재밌는 대목이 있다. <고프먼의 학문과 일생을 관통했던 주제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그것은 "세상을 액면 그대로 바라보지 마라"이다.>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나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며 행복이다.


위 구절은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엽서에 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짧은 구절이지만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듯했다. 내가 '발버둥 치는'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글귀에서 말미암은 몇 가지 단상이 마음에 길게 남았다. 나무가 되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에 갇혀 발버둥 치기보다는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라는 전언이 특히 그랬다. 고향과 행복에 대한 말도 인상적이다. 다른 무엇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아는 어떤 존재는 스스로 고향이 되고, 스스로 고향이 되는 존재감은 행복하다.


저 글귀는 한편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전언이 아닌가 싶다. 모든 존재감에는 시간과 공간이 스며있다. 그런데 나무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고, 고향처럼 자리 잡은 공간이 없는 존재는, 제 근원을 찾아 헤매며 발버둥 치는 게 아닐까.


영국 작가 존 버거가 쓴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첫째로 '시간'에 대해, 둘째로 '공간'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책머리에 아예 이렇게 적혀 있다. "1부는 시간, 2부는 공간에 대한 것이다." 단상이라고 할 만큼 짧은 에세이들이 엮어져 있는데, 글마다의 밀도가 높아서 꼭 짧은 글이 아닌 것처럼 읽힌다.


존 버거는 현대인들을 근원적인 시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바라본다. 근대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흐름은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을 통해 인간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누구나 지금 '시각'은 정확히 알지만 인간과 해질녘의 관계, 인간과 계절의 관계는 상당히 무너졌다. 그리고 시간은 바로 순환이라는 인식은 현대에 거의 희박해졌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집'에 대한 해석이다. 버거에 따르면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이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집'의 근원은 지리가 아닌 존재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집에서 떠나는 일, 즉 '이주'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주는 무언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것, 낯선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의미 자체를 해체하고, 최악의 경우 어리석은 허구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 이주는 항상 세상의 중심을 뒤엎는다. 또한 인간들을 방향 잃고 상실된 파편들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이주는 당연히 제 뜻과 필요에 따라 행하는 '이사'와 다르다.


제 뜻이 아닌 이주, 특히 타의에 의해 집으로부터 뿌리 뽑히는 이주의 경우는 그래서 '죽음'과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용어 중에 이런 식의 이주를 일컫는 말은 바로 밀양에서, 강정에서, 만덕동에서, 또 지금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에서 벌어지는 '행정대집행'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은 지리뿐만 아니라 존재를 파괴하는 일, 즉 살해나 마찬가지다. 더는 없어야 할 행정대집행이라는 폭력, 그것이 행해지는 주된 이유는 '개발'과 '공사'다.


옥천에도 공사 현장이 정말 많다. 대개는 아파트가 세워질 자리다. 그 터를 가만 바라볼 때면 '고향'을 무너뜨리고 '아파트'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 모습인 듯싶어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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