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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의 포도밭> 이반 일리치 지음

일리치의 지적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일지 여부를 떠나, 분명한 변화상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인 점만은 확실하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펼쳐 읽은 일리치의 책들을 이제 모두 덮으면서도 처음 고민에 빠지게 한 문제는 여전하다. 인쇄된 언어에 대한 독점을 타파하고 등사물들의 연옥에 빠지지 않을 지금 우리의 방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은 2016년에 현암사에서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나는 2013년 가을까지 현암사에서 편집자로 근무했는데 퇴사하기 전 이 책을 기획하고 나왔다. 그래서 나름 인연이 있는 책이다. 게다가 ‘포도밭출판사’라는 이름을 지을 때도 어느 정도는 이 책에서 묘사되는 포도밭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라고 해야 할 이 책을 여태까지도 전부 읽지는 않았다. 생각날 때마다 띄엄띄엄 읽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원래도 책을 꼭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야만 합당한 독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책을 읽는 속도는 유난히 느리다. 변명하자면 아껴서 읽는 거라고 하고 싶다. 그러다 최근에 다시 펼쳐들었다. 이반 일리치의 다른 책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그 머리말에 적힌 인상적인 한 구절이 다시 <텍스트의 포도밭>을 펼치게 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의 머리말 중 한 구절이다. “이 책의 글들은 (...) 성격상 정기간행물에 싣기 어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쇄된 언어를 출판업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탓에 등사물들의 연옥에 빠지기 십상인데다 (...)” ‘등사물들의 연옥’이라는 표현이 참 인상적이었다. 진지하고 심각한 말일 수도 있는데 어쩐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최근 나 역시 책들로 가득한 서점이나 책장을 볼 때면 알게 모르게 ‘등사물들의 연옥’이라는 표현과 일치하는 감상을 가지곤 했기에. 그리고 일리치의 지적을 그대로 적용하면, 나는 ‘인쇄된 언어를 독점하는 출판업자’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 공감하고 지적을 받아들이자 다시금 ‘책’에 대한 성찰이 가득한 <텍스트의 포도밭>을 펼쳐보자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일리치는 서양 중세 시대인 12세기 무렵 명맥이 끊어진 ‘수도사적 읽기’의 의미를 탐색한다. 지금은 누구나 글을(특히 책에 적힌 글을) 읽을 때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 읽지만, 12세기 때까지만 해도 책은 ‘소리 내서 읽는 물건’이었다는 것이다.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일은 묘기에 가까운 것으로 취급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시도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당시에는 독서 행위가 두뇌 활동만이 아닌 신체를 다양하게 동원하는 활동이었다는 점이 가장 핵심이다. 누군가(자기 스스로를 포함해서) 글자를 소리 내서 말하면 그 소리를 받아들이고 묵상하는 일이 당대의 ‘독서’였다는 점을 일리치는 문헌을 통해 확인시킨다. 이러한 전통은 주로 수도원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졌다. 그러다 12세기 후반부터 비로소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는 방법들이 창안되기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띄어쓰기’라는 편집 기술이 생겨나고, 각주, 색인, 인덱스가 책의 레이아웃에 자리 잡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라틴어에 깃들어 있던 신성한 권위가 해체되면서 알파벳 문자를 전보다 자유롭게 사용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책은 말의 시대를 지나 문자의 시대에 맞는 매체가 된다. 이 시대적 변화를 일리치는 ‘학자적 읽기’가 시작되는 분수령이라고 표현한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인류가 근대화를 겪기 이전, 특히 12세기 서양 중세 사회의 변화상을 깨우치는 한편 ‘책’이라는 매체의 변천을 되짚어보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이다. 여기서 궁금증을 확장하면, ‘학자적 읽기’ 시대 이후 책은 과연 어떤 물건이 되고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식을 보관하는 창고이자 지식의 내용을 공학적으로 해석하도록 여러 레이아웃 기능을 통해 안내하는 물건의 지위를 갖던 책은 지금 무엇이 되고 있는가. 이에 대한 일리치의 견해는 그의 또 다른 저작인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를 보면 찾을 수 있다. 책이 필사의 시대, 인쇄의 시대를 지나 컴퓨터 파일의 시대가 된 지금, 텍스트들의 자리는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스크린’이라는 말은 컴퓨터 모니터에 대한 은유만은 아니다. 이제 인류는 종이에 적힌 글을 읽을 때도 스크린 위를 미끄러지듯 읽는다. ‘기억의 틀’이고 ‘지혜가 닻을 내리던 항구’이던 ‘책’의 전통은 이로써 저물고 있다고 일리치는 진단한다. 그러면서 책-스크린을 읽는 현대인의 독서는,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지혜를 묵상하는 행위’이던 12세기로부터 멀어져 ‘인공 지능적 활동’이 되어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한다.

<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지음

보통은 ‘안내서’라는 말이 붙으면 ‘길 찾기 안내서’라고 해야 어울리는 법인데 이 책의 제목은 <길 잃기 안내서>이다. 책의 부제는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이 제목들로 짐작해 보면 이 책은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길 잃기’를 안내하는 책이리라. 더 먼 곳은 어디일까? 더 먼 곳에 이르면 무엇이 기다리는 것일까? 저자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멀고도 가까운> 등으로 이름을 알린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이다. 방금 소개처럼 그는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이기에 자연스레 그의 책들도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담은 책과 개인의 내밀한 생각을 드러내는 에세이로 나뉘는데 이 책은 에세이에 속한다. 구성이 독특하다. “1장 열린문 / 2장 먼 곳의 푸름 / 3장 데이지 화환 / 4장 먼 곳의 푸름 / 5장 방치 / 6장 먼 곳의 푸름 / 7장 두 개의 화살촉 / 8장 먼 곳의 푸름 / 9장 단층집”. 이것이 책의 목차이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어느 과거로 훌쩍 떠났다가 ‘먼 곳의 푸름’이라는 제목을 가진 장으로 꾸준히 돌아온다. ‘먼 곳의 푸름’ 장에는 주로 작가가 빠져드는 ‘푸름’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수평선의 푸름, 이브 클랭의 ‘푸른색’,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에 대한 이야기 등등. 푸른색은 우울, 멜랑콜리 등을 상징하는 색으로 저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두움을 표현하는 색이기도 하다. 훌쩍 떠났다가도 거듭 ‘푸름’으로 회귀하는 구조는, 이 이야기가 실은 ‘길을 잃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떠나지만 떠나지 못하는. ‘푸름’은 작가에게 일종의 ‘집’인 것이다. 끝내 바깥에서 문을 잠그지 못하는 집. 불태우고 떠나지 못하는, 그래서 다시 문앞에 서게 되는 그런 집. 그렇다면 길을 잃은 일은 실패인가. 책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는데 ‘wander’이다. 작가는 어느 날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낡은 책에서 본 대목을 소개한다. “피트리버 원주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희한한 현상이 하나 있다. 그들은 그 현상을 ‘방랑하다(wander)’라는 영어 단어로 묘사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방랑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방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정신적인 압박을 받은 탓에 이전까지 익숙했던 환경에서의 삶을 갑자기 견디지 못하게 되는 일인 듯하다. 그런 사람은 방랑하기 시작한다. 목적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낡은 책의 대목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신이 정말로 야성적인 상태가 되면, 그런 야성적인 존재들이 어쩌다 당신을 볼 수 있고 심지어 그중 하나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다. 당신이 추위에 떨며 고생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당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방랑은 끝난다. 방랑하던 사람은 이제 샤먼이 된다.” 낡은 책이 알려주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닐까. 방랑하는 사람이 방랑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는 이전과 다른 존재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재차 ‘푸름’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지만 매번 다른 내용의 ‘푸름’으로 돌아가듯이. 같은 집으로 들어가더라도 다른 존재가 되어 돌아간다면 그것은 방랑이 이룬 성과일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상실이 발견이 되는 순간’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길 없는 곳, 막다른 곳이 어떻게 ‘새로운 길’일 수 있는지를 역설한다. 그래서 길을 잃고 심지어 자신을 잃는 경험조차 두려워만 하지는 말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더 먼 곳이란 어디일까? 더 먼 곳에 이르면 무엇이 기다리는 것일까? 지도에서 가장 먼 곳은 지도의 끝이 아니라 지도의 바깥이 아닐까. 그런데 지도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를 바꾸는 일이라도 해볼 만하다. 다른 지도가 있는 곳은 바로 다른 세상이니까.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방법은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교훈처럼 우선 길을 잃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잃는 경험을 통해서일 것이다. 자신을 잃고서야 펼쳐지는 가능성. 얼마 전 <무명의 말들>을 낸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유리창의 이쪽이 밝고 저쪽이 어두우면 밝은 쪽은 나를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유리창 너머의 다른 존재를 보기 위해서는 이쪽의 불을 끄면 된다. 처음엔 깜깜하겠지만 차츰 반대쪽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사회)운동을 하려면 불을 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 나는 지금 불을 끈 채로 나를 바라보며, 나의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가 보이길 기다리고 있다.”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이 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 쉼보르스카가 쓴 서평집이다. 맞다, 시인이 쓴 서평집이다. 게다가 '비필독도서'들에 대한 서평집이다. 꼭 읽어야만 하는 이른바 '필독도서'가 아닌, 읽든 안 읽든 무방한 책들만 꺼내 읽었다고 쉼보르스카는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서평집의 제목도 <읽거나 말거나>이다. 얼마나 가뿐한가. 시인은 책 앞머리의 '저자의 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처음에는 정말 제대로 된 리뷰를 써보겠노라 결심했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리뷰를 쓸 줄 모른다는 걸, 게다가 그다지 쓰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란 내게 때로는 그 자체로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느긋하고 자유롭게 공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구실이기도 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문인답지 않게 자신은 그저 독자, 아마추어, 애호가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새롭고 산뜻한데, 책은 공상을 위한 구실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쉼보르스카는 서평을 쓰면서,아니 그 전에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느긋하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치곤 한다. 몇몇 대목을 읽어보자. 조지아 뱅드로프스카의 <아름다워지기 위한 100분의 시간>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100분을 투자하라고? 그것도 날마다? 일과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반 여성들에게는 누리기 힘든 일종의 사치다. 어쩌다 짬을 내서 시도해보려 해도 막상 이 책을 대충 훑어보고 나면 100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다음 편 글인 <동물들의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주 오래전, 학창시절의 친구였던 짚신벌레가 떠오른다. 한때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짚신벌레를 노트에 그려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짚신벌레는 나에게 따분한 대상에 불과했고, 세포분열 과정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저 분열하니까 분열하는 거라고 여겼다. 절친한 친구였던 마우고시아와 함께 크라우프의 낡은 영화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성인영화를 관람하는 게 내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쉼보르스카는 끊임없이 권위적이고 고루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필독도서'가 아닌 '비필독도서'만 찾아 읽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그는 책 읽는 행위를 지겹고 답답한 일로 만들지 않고자, 자유로운 놀이로 만들고자 애쓰는 독자이다. 그가 밝히는 소신은 이러하다. "내가 구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 (…) 이런 즐거움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단조로워질 것이며, 동시에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 책을 갖고 노는 호모 루덴스는 자유롭다. 적어도 주어진 자유를 가능한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호기심에 부합되는 주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 혹은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중생대 지층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쉼보르스카의 글에 등장하는 '자유'라는 단어에는 특별한 감각이 담긴 듯하다. 내가 쉼보르스카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택의 가능성들>처럼. 형식과 제도에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가 느껴져서 좋다. <읽거나 말거나>는 137편의 서평을 엮은 책이라 내용을 간추려 전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너무 즐겁게 읽은 책이라 꼭 소개하고 싶었다. 쉼보르스카의 글을 읽으면 '자유롭게 읽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쓰는 일'을 너무나 따라하고 싶어진다. 그는 이 서평 연재를 무려 35년간 계속했다. 자유롭게 읽고 맘대로 쓰는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눈 감을 때까지 계속했다는 점이 정말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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