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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9월 21일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지음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신기하게도 처음 아기들은 문법과 어휘에 대한 지식 없이도 말을 듣고 이해할 줄 안다. 예전에 우연히 본 한 인터넷 동영상이 생각난다. 한 미국 가정에서 태어난 한두 살짜리 아기가 부모가 시키는 말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부모가 사용한 말은 물론 영어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모른대도 학교에서 영문법과 영단어를 익힌 시간으로 치면 그 아기보다 월등히 길 텐데,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그 아기는 알아듣는다. 문법이나 어휘에 대한 지식과 말을 알아듣는 의지나 지능이 정비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지한 스승>의 처음에도 신기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한 학자 조제프 자코토가 겪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자코토는 망명 이후 루뱅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문제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자고토 본인이 네덜란드어를 전연 할 줄 몰랐다. 그렇다며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는 마침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학생들에게 건네면서 이 책으로 프랑스어를 익히라고 주문한다. 가능한 일인지 모른 채 일종의 모험을 해본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기본조차 설명하지 않고 다만 두 언어 간의 대조가 가능한 책 한 권만을 전달했다.


이 우연한 실험의 결과는 놀라웠다. 학생들은 원래 알던 네덜란드어와 대조하며 프랑스어본을 읽으면서 프랑스어 단어와 그 단어들의 어미변화 이치를 스스로 습득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자고토가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고 생각한 바를 프랑스어로 써보라고 했을 때는 학생들이 거의 작가 수준의 글을 적어 과제로 제출했다.


자고토는 이 우연한 지적 실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게 만든다면 스승은 자신이 모르는 것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 안에는 스승이라는 자들이 저지르는 중대한 오류에 대한 성찰이 숨어 있다. 스승은 자칫 '자의적인 고리 안에 지능을 가두는 자'이기 쉽다는 점이다. 가르치고 설명하는 자, 즉 앎을 지도하는 자는 제 틀 안에 학생의 지능을 가두고 만다. 실은 인간은 누구든 지능을 타고났으며, 아기가 언어처럼 삶에 필요한 기술을 처음에 어떤 '설명' 없이도 익히듯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앎을 성취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설명자'들은 간과한다는 것이다.


<무지한 스승>의 저자 랑시에르는 자고토의 경험이 전하는 교훈을 통해 현대의 '교육'이 품고 있는 잘못된 전제를 비판한다. 현대사회의 교육제도 안에는 '인간의 지능은 모두 평등하다'는 전제가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현대 교육 제도는 앎의 불평등을 축소하려는 제도로서 기능하고 발달해왔다. 하지만 교육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전제 없이 '불평등'을 문제로 다룬다. 이는 교육이 겉으로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는 선의의 제도로 비춰지는 구실이 되지만, 결국 인간은 모두 평등함을 조금도 믿지 않는 제도인 탓에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어긋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하는 것이다.


조제프 자고토는 앞서의 우연한 실험을 하기 전에는, 스승이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여 학생들을 스승의 수준만큼 끌어올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즉 스승은 '설명하고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험 이후 자고토는 자신의 믿음을 뒤엎는다. 이제 자고토는 설명의 원리란 '바보 만들기'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스승이 학생의 의지를 늘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킨다면, 아무리 뛰어난 내용의 교육이라도 '바보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지와 지능의 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적 해방'이 필요하다. 스승이 할 일은 '설명'이 아니다. 스승은 무엇보다도 학생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학생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스승 자신이 해방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배움을 위해서는 설명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일은 자고토와 랑시에르가 말하듯 우리의 타고난 지능이 온전히 발휘되도록 '해방'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유식한 설명자보다 학생을 해방하는 무지한 스승이 '보편적 가르침'에 어울리는 스승인 것이다.

<농업 변동의 계급 동학> 헨리 번스타인 지음, 따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다. 농촌 생활이 '예쁜 그림'처럼만 보여지는 듯해서 불만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밌게 보았다. 그러고 시간이 좀 지나 우연히 어느 관객의 영화 감상기를 보았는데 거기 담긴 영화에 대한 지적이 또한 참 재밌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첫째, 영화 도입부에서 오래 비워두었다 돌아온 집 대문 옆에 쌓인 통나무 땔감의 절단면이 새하얗더라는 것. 그것은 영화의 설정과 달리 장작을 방금 패서 쌓았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날 차가운 난로에 불을 때면 연통에서 연기가 역류하기 마련인데 어째 영화에서는 연기가 하나도 안 나느냐는 지적과, 시골집을 오래 비우면 돈벌레나 거미 소굴이 되기 마련인데 거미줄 하나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지적까지. 실제 시골에 사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깨알 지적들이라 재밌었다. 사소한 디테일만 문제 삼는 건 아니었다. 농촌 생활이라면서 땀 흘려 일하는 장면이 너무도 드물다는 지적은 참 타당하다. 영화 주인공이 맛나 보이는 음식들을 많이 해먹는데, 마트에서 장만 잘 보면 어디서든 해먹을 수 있는 그런 음식들을 보여주는 게 농촌 생활과 무슨 연결점이 있느냐는 지적도 타당하다. 결국 글쓴이는 영화를 본 소감을 "예쁜 세트장에서 찍은 예능 보고 온 기분"이라고 정리했는데 나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요컨대 영화는 농촌 생활과 농민의 삶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여 보여준다. 영화가 다 그런 거지, 라는 입장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실제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입장에서는 '낭만화'에 대한 불편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리라. 글쓴이는 마침내 "(임순례) 감독님도 시골 생활 안 해봤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겪어봐도 모르는 일은 많다. 오히려 겪을수록 모를 때도 있다. 이를 테면, 위의 말대로 시골에 살면 시골 생활을 아는 걸까. 시골 생활도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엄청 다양한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 안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한편 이런 문제도 있다. 시골 자체를 넘어 시골을 둘러싼 환경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시골을 단편적으로, 단순화해서 아는 데 그치지 않을까. 최근에 농촌과 농업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될 문고 시리즈가 출간되고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도서출판 따비가 펴내는 '따비 스터디' 시리즈다. 현재 출간된 총 세 권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농업 변동의 계급 동학>이다.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첫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농민'을 말할 때 그 농민은 누구인가? 어떤 계급인가?"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농민을 단일한 '농민 계급'으로 여기곤 하지만, 사실은 농민 안에도 다양한 계급 구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테면, 다수의 임노동자를 고용해 영농을 하는 대농과 가족이 모두 달려들어 농사를 지어 겨우 먹고살 만한 소출을 내는 소농의 경우, 둘 다 '농민'으로 불릴지언정 그들의 사회경제적 계급은 다르다. 일반의 농민 중에도 다양한 계급 분화가 존재한다. 소농, 소규모 농민, 가족농 역시 따지고 보면 각각 다른 계급이다. 나아가 소농이나 가족농 안에서도 소규모 자본주의적 농민, 상대적으로 성공한 단순상품생산자, 임노동자 등의 계급 분화가 존재한다. 이처럼 똑같이 '농민'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계급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첫 번째로 강조하는 점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이유로 "농민은 '땅의 사람들'이다"와 같은 단순화한 인식을 비판한다. 농민을 '땅의 사람들' 같은 낭만화한 단일체로 파악하면 결코 '농업 변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농업 변동, 즉 '농업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은 농민에 대한 단일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농민 안의 다양한 계급 분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농업의 변동을 올바로 포착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화두는 급변하는 지구적 구조 및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농업은 어떻게 될까, 농업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일이다. 그러면서 농업의 '복잡성'을 그려 보이려 한다. 그런데 '농민 계급 분화'와 '농업 복잡성'에 대한 연구는 무엇에 수렴하는 것일까. 마지막,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농촌에서의 계급투쟁, 그리고 농민이 주체가 되는 저항운동을 어떻게 조직할까"를 고민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 2018년 6월 14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관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의 말을 따라 생각하면 언어를 잃는 것은 존재가 머물 곳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도 언어를, 존재의 집을 상실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난민이 되면서 고향과 사랑하는 이와 모국어를 잃고 만 것이다. 네 살 때부터 헝가리어를 수월하게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는 프랑스어를 쓰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문맹의 처지가 된다. 이 상실감은 고향에서 내쫓긴 비통함 이상이다. 새로운 자리에서 그는 간절하게 읽고 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시계 공장에서 12시간씩 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낯선 언어인 프랑스어를 익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전쟁 통에서 겪은 일들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 작품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는 그의 3부작 소설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 창작은 언어를 도구로 존재의 집, 상실한 고향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는 <비밀노트>, 2부는 <타인의 증거>, 3부는 <50년간의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3부작 각각의 내용은 이어진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1부에서 독자는 전쟁 통에서 살아가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2부에서는 쌍둥이 형제와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한 남자, 루카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에서는 헤어졌던 쌍둥이 형제, 즉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비로소 다시 해후하는 내용이 그려진다. 위와 같이 설명을 하면 통일성을 지니고 일관성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 같지만 실제 이야기 속에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모순과 있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엇갈리는 대목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쌍둥이 형제는 두 사람인가, 한 몸인가?'를 의심케 하는 순간이 있다. '루카스(혹은 클라우스)가 말하는 기억들은 사실인가, 그저 노트에 꾸며 적은 이야기인가?' 역시 혼란스러워진다. 급기야 쌍둥이 형제의 존재 자체에도 의심이 생긴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과연 누구의 기억인가?' 소설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보면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있다. "이 소설에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K시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다. 작중 인물인 루카스는 나와 닮은 점이 많다. 내가 10살 때 전쟁이 끝났다. 나도 어려서 국경을 넘었다. (...) 클라우스는 나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오빠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였다."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사실이라기에는 엇갈리는 진술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존재들은 누가 누가인지 믿기 어렵게 뒤섞이는 것일까.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로서 같은 알파벳 철자에서 순서만 바뀐 이름인 것은 이들의 '존재 바꾸기'를 암시하는 것일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쓰기는 언어로써 존재의 집을 마련해가는 시도로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존재의 제자리를 끊임없이 정위(定位)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그러듯, 너와 나의 자리를 이동하며 우리의 제자리를 찾는 시도. 소설에는 그러한 '움직임'들이 가득하다. 극단적으로 차갑고 건조한 문장들 아래서 활동하는 것은 존재들의 저 치열한 움직임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 화자의 말투가 덤덤할수록 더욱 뜨겁게 읽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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