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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나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며 행복이다.


위 구절은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엽서에 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짧은 구절이지만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듯했다. 내가 '발버둥 치는'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글귀에서 말미암은 몇 가지 단상이 마음에 길게 남았다. 나무가 되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에 갇혀 발버둥 치기보다는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라는 전언이 특히 그랬다. 고향과 행복에 대한 말도 인상적이다. 다른 무엇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아는 어떤 존재는 스스로 고향이 되고, 스스로 고향이 되는 존재감은 행복하다.


저 글귀는 한편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전언이 아닌가 싶다. 모든 존재감에는 시간과 공간이 스며있다. 그런데 나무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고, 고향처럼 자리 잡은 공간이 없는 존재는, 제 근원을 찾아 헤매며 발버둥 치는 게 아닐까.


영국 작가 존 버거가 쓴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첫째로 '시간'에 대해, 둘째로 '공간'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책머리에 아예 이렇게 적혀 있다. "1부는 시간, 2부는 공간에 대한 것이다." 단상이라고 할 만큼 짧은 에세이들이 엮어져 있는데, 글마다의 밀도가 높아서 꼭 짧은 글이 아닌 것처럼 읽힌다.


존 버거는 현대인들을 근원적인 시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바라본다. 근대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흐름은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을 통해 인간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누구나 지금 '시각'은 정확히 알지만 인간과 해질녘의 관계, 인간과 계절의 관계는 상당히 무너졌다. 그리고 시간은 바로 순환이라는 인식은 현대에 거의 희박해졌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집'에 대한 해석이다. 버거에 따르면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이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집'의 근원은 지리가 아닌 존재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집에서 떠나는 일, 즉 '이주'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주는 무언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것, 낯선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의미 자체를 해체하고, 최악의 경우 어리석은 허구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 이주는 항상 세상의 중심을 뒤엎는다. 또한 인간들을 방향 잃고 상실된 파편들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이주는 당연히 제 뜻과 필요에 따라 행하는 '이사'와 다르다.


제 뜻이 아닌 이주, 특히 타의에 의해 집으로부터 뿌리 뽑히는 이주의 경우는 그래서 '죽음'과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용어 중에 이런 식의 이주를 일컫는 말은 바로 밀양에서, 강정에서, 만덕동에서, 또 지금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에서 벌어지는 '행정대집행'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은 지리뿐만 아니라 존재를 파괴하는 일, 즉 살해나 마찬가지다. 더는 없어야 할 행정대집행이라는 폭력, 그것이 행해지는 주된 이유는 '개발'과 '공사'다.


옥천에도 공사 현장이 정말 많다. 대개는 아파트가 세워질 자리다. 그 터를 가만 바라볼 때면 '고향'을 무너뜨리고 '아파트'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 모습인 듯싶어 괴롭다.


<두 순례자>(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수록), 레오 톨스토이 지음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두 순례자>는 예핌과 엘리세이, 두 노인의 이야기다. 예핌은 모든 일에 있어 신실하고 자기 일에 엄격했으며, 나이가 일흔 살이었지만 건강도 젊은이 못지않았다. 그에 비해 엘리세이는 몸집이 왜소했고 얼굴빛도 거무스름했으며,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노래 부르며 사람들과 노는 일을 좋아했다.


두 노인은 더 나이 들기 전에 함께 성지 순례를 떠나자고 한참 전부터 약속해둔 터였다. 그런데 예핌이 항상 일이 많아 바쁘다며 약속을 미뤘다. 예핌은 집안일부터 자식들 일까지 뭐든지 자기가 단도리를 해야 직성이 풀렸으므로 늘 여유가 없었다. 반면 엘리세이는 자기가 집에 없더라도 다들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믿었기에, 어서 간절히 바라온 순례를 떠나자고 재촉했다. 심지어 엘리세이는 예핌처럼 부자가 아니라서 여행 자금이 부족하면서도 그렇게 졸랐다. 둘은 가네 마네 옥신각신하던 끝에 결국 예핌이 마음을 잡으면서 길을 떠나게 된다.


여로에 오른 지 다섯 주째였다. 그날 두 노인은 어느 흉년 든 지역에 이르렀다. 계속 나란히 걷던 둘은 엘리세이가 농가에 가서 물을 좀 얻어먹겠다고 하는 탓에 결정적으로 길이 어긋난다. 예핌은 목표한 순례지를 향해 쭉 걸어가지만, 엘리세이는 물 한 잔 얻어 마시러 간 농가에서 용무를 마치고 바로 돌아 나오질 않은 것이다.


엘리세이가 찾아갔던 농가에는 흉년 탓에 굶주린 일가 식구들이 곧 죽을 듯이 지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아이들은 기력이 없고 어른들도 맥없이 누워 있었다. 그 집 할머니에게 물어 사정을 들어보니, 이 가족의 상황이 원래부터 이토록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가족은 흉년에도 불구하고 먹고살려고 서로 도우며 열심히 지냈는데, 없는 형편에 지쳐가던 차에 급기야 전염병이 덮치면서 일순간 위험한 지경이 된 것이었다. 엘리세이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친구를 따라갈 생각을 접고는 그날부터 그 집에 머물며 마치 자기가 집주인인 것마냥 집안일을 해내기 시작했다.


나흘 동안 간병을 하자 가족들의 건강이 회복세를 보였다. 엘리세이는 그제야 떠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음처럼 몸이 떠나지질 않았다. 자기가 떠난 뒤 다시 곤경에 처할지도 모르는 이 가족의 형편을 생각하자 홀가분하게 순례 길에 오를 수가 없었다. 결국 엘리세이는 가족들이 부칠 땅을 사주고 말과 밀가루와 젖소까지 사준 뒤에야 다시 여로에 올랐다. 하지만 이제는 수중의 돈이 모자랐기에 순례지로 가는 것은 포기해야 했다. 엘리세이는 다시 수 주를 걸어 집으로 돌아왔고, 어찌된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만 돈을 잃어버려서 혼자 돌아왔다'고만 설명했다.


엘리세이와 헤어져 순례지로 향한 예핌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예핌은 마침내 베들레헴 성지에 도착했고 여러 날 동안 그곳에서 기도를 했다. 하지만 수중의 여비를 혹시나 도둑맞지 않을까 걱정하느라, 두고 온 식구들이 재산을 잘 지키고 있는지 걱정하느라 시시각각 마음이 가볍지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일 년 가까이 흐르고 마침내 예핌도 자기 마을로 돌아온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다. 마을로 돌아온 예핌은 드디어 엘리세이와 조우한다. 그리고 자신이 순례 내내 찾았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로 친구 엘리세이에게서 발견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예핌 자신은 긴 순레 내내 기도를 쉬지 않았지만, 진정 신을 만나고 온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언제나 삶과 생명을 사랑한 엘리세이라고.

<근질거리는 나의 손>, 김성원 지음


지난주 며칠간 이어진 한파에 세탁기가 얼었다. 사나흘은 괜찮았지만 닷새가 넘어가자 차츰 입을 옷이 없어지고 손빨래를 해야 하는 불편이 시작됐다. 게다가 탈수 기능으로 물기를 빼지 못한 옷들은 제대로 마르질 않았다. 그때 예전에 어느 웹사이트에서 우연히 본 소위 '적정기술 세탁기'가 떠올랐다. 이 물건은 페달을 밟으면 내부의 통이 돌면서 세탁과 탈수가 되는 도구로 전기 없이 작동하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새삼 '전기 없는 세상'을 상상하면서 '이참에 적정기술 세탁기를 구해볼까'라고까지 생각했으나 알아보니 국내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우리는 전기 없는 세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전기를 적게 쓰는 세상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다. 만일 전기가 넘치는 세상을 좇다가는 핵 발전과 같은 대규모전력생산시스템에 대한 의존이 심해지기 십상인데, 이러한 전력시스템은 필연적으로 대형사고 위험을 내포한다. 그리고 후쿠시마처럼, 밀양처럼 삶터와 자연을 파괴하는 비극을 일으키고 만다.


그런데 전기라는 에너지를 쓰지 않으면 지금 우리의 생활을 가능케 하는 저 많은 작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질거리는 나의 손>에서 근사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새로운 사회와 삶의 경로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손'을 쓰라고 권한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길을 가다 한 노인이 항아리로 채마밭에 물을 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효율은 낮고 힘들어 보였다. 자공은 용두레라 불리는 물 대는 기계를 써보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노인은 일을 쉽고 빠르게 하려고 기계를 만들어 쓰고자 하면 반드시 '기심(機心)'이 생기게 되어 순진하고 소박한 생명력을 잃게 된다고 한다. 기심으로 인해 정신과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면 도를 체험하고 살필 수 없다며 거절했다. (13쪽)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이 채마밭 노인의 일화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하루의 삶이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기계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고루할 수 있다. 하지만 기심 없는 삶, 순진하고 소박한 생명력으로 채워지는 삶으로의 전환을 생각하면 기계를 거부하는 노인의 실천은 꽤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 책의 저자는 국내에 직정기술과 수공예 생활기술 들을 소개하고 실천해온 선구자 중 한 사람이다. 국내 처음으로 '흙부대 집'을 지어서 살고 있으며 손수 난로제작, 직조, 미장 등을 익히고 가르치고 있다. 앞서 채마밭 노인의 일화에서 드러나듯, 이 책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기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손의 기술을 되살리고 몸의 에너지를 활용하면서 "만들고 생각하고 꾸미고 창작"하는 삶을 도모해나가자는 것이다. 한편 책에는 전기, 기계, 자본 등이 압도하는 현대 산업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도 가득하다. '손 쓰는 삶'이란 몸이 지닌 잠재력을 앗아가는 산업 문명에 맛서는 대안으로도 유의미하다.


워낙 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서 책에 소개된 여러 생활기술들을 보며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들지만, 그럼에도 잠자고 있는 우리 안의 '손 쓰는 인간'을 깨우자는 말이 참 솔깃하다. 이 책은 생활의 재료들을 직접 매만지고 두들기면서 살고 싶어 '근질거리는' 이들에게 훌륭한 발판이 돼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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