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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 현암사 / 2012년 이 책은 여행기이자 소설이다. 사실 장르가 명확하지 않다. 작가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돌아다니며 적은 기록인 터라 일단 여행기로 보이지만, 간혹 허구로 보이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가 다른 책에서 가져온 문구와 짤막하게 적은 단상들을 맥락 없이 툭툭 넣기도 했다. 장르가 불분명한 이유다. 사정이 이런 탓에 서점에서 이 작가만을 위한 서가로 '뉴논픽션 코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갑작스레 독자들 앞에 나타나 낯설고 강렬한 여행기 두 권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 작가. 이 작가는 존 업다이크로부터 "종이 몇 장에 세상을 담은 작가"라는 칭송을 받은 브루스 채트윈이다. 브루스 채트윈이 작가가 되기 전에 하던 일은 미술품 감정사였다. 18세 어린 나이에 소더비스 사의 경비로 취직한 것이 경력의 시작. 그러다 미술품을 보는 감식안을 인정받아 이내 감정사로 발탁된다. 그리고 몇 해만에 이사 자리에 오르고 소더비스 사의 명성을 이끄는 주요 인물이 된다. 하지만 시력에 문제가 생겨 소더비스 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예술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로 경력을 시작한다. 그러다 1974년 사고(?)를 친다. 어느 날 다니던 직장에 "6개월간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전보 한 통을 부치고 남미 대륙 파타고니아로 홀연히 떠난 것이다. 그때 여행의 성과가 그의 첫 작품 <파타고니아>이다. 채트윈은 이 책으로 "여행 문학은 브루스 채트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칭송까지 얻게 된다. 채트윈은 사실상 이때부터 인간의 삶의 양식은 본질적으로 거주보다 유목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의 삶의 뚜렷한 화두는 내내 노마드, 즉 '유목하는 삶'이었다. <파타고니아> 이후 10년 후 펴낸 생애 두 번째 여행기가 <송라인>이다. <송라인>에는 유목하는 삶에 대한 인류학적 혹은 철학적 탐사가 담겨 있다. 배경은 앞서 적었듯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여기서 채트윈이 뒤쫓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인 애버리지니들이 섬기는 '송라인' 즉 '노래의 길'이다. 송라인은 애버리지니들이 믿는 창조 신화이다. 애버리지니들은 태초의 조상들이 대륙을 돌아다니며 세상 만물을 만났고, 그것들의 이름을 노래로 부름으로써 비로소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태초의 조상들은 대륙을 떠돌며 새를 만나면 새를 노래로 부르고, 개미를 만나면 개미를 노래로 부르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노래로 불렀다. 그렇게 노래로서 세상을 창조해간 발자취가 있는데 그것이 '송라인'이다. 더 신비로운 일은 후대들의 의식과 문화이다. 애버리지니들의 삶의 중대한 목표는 조상들이 창조한 땅을 "본디 상태이자 있어야만 할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혼을 다해 다음과 같은 의식을 거듭했다. 자신이 믿는 조상의 송라인을 따라 걸으며 "단어 하나, 음 하나 바꾸지 않고 조상의 시구를 부른다. 그리하여 창조를 재창조한다." 조상들을 따라 대지의 거죽 밑에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을 모두 노래로서 (재)창조해야 한다는 소명. 이것이 애버리지니들이 섬기는 전통인 것인데, 실제로 이들은 위와 같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명에 따랐다고 한다. 조상의 송라인을 좇으며 전수받은 노래를 부르는 것. 그래서 만약에 송라인으로 섬기는 실제 지형이 무너지거나 파괴되면 생명을 잃는 것처럼 고통을 느꼈다. 노마드를 탐구하던 채트윈은 저곳에서 이와 같은 인류의 문화를 만났다. "본디 상태로 있게 하려는" 소명. 그리고 노래로서의 (재)창조. 지금 우리에게 저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있던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리베카 솔닛 지음 책의 저자는 리베카 솔닛. 올해 출간된 화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솔닛이 2010년에 출간한 책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인권, 기후변화, 반전, 반핵 문제 등에 천착해온 솔닛은 이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저술가이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난 탐사기'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까지, 지난 100여 년간 일어났던 다섯 건의 대형 재난을 탐사한다. 탐사의 결론에는 반전 아닌 반전이 있다. 그 하나는 대재난에 처한 인간이 이럴 것이라는 통념 - "재난 시 인간은 상실과 고통과 비애에 사로잡히고, 사회는 약탈과 파괴와 살인과 폭동의 디스토피아로 변할 것이다" - 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재난에 처하면 "사람들은 기존 사회질서가 무너진 이 폐허 속에서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가치에 의문을 갖고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응시하게 되며", 평소보다 훨씬 이타적인 인간 본성이 두드러지고, 스스로 자율적인 재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따뜻한 연대와 상호부조를 꽃피운다는 것이다. 재난은 인간의 믿음과 행동에 따라 '재난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여러 재난의 역사를 더듬고,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많은 재난 경험자의 육성을 듣는 작업을 거쳐 제기하는 이 책의 파격적인 주장이다. 또 하나 반전 아닌 반전은, 그렇다면 공포로 범벅된 재난에 대한 저 디스토피아 이미지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세력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 세력은 바로 '엘리트'들이다. 재난 시 누구보다 먼저 '패닉(공황)'을 일으키는 소수의 권력자들. 이들은 자신들 외의 일반 시민들이 공항에 빠져 폭동을 일으킬 거라는 상상의 공포 탓에 '엘리트 패닉'을 일으킨다. 결국 자신들이 수호하는 질서가 무너지는 게 두려워서 시민들을 폭력으로 통제한다. 그리고 "재난 속에서 서로 돕고자 연합한 이들의 공동체를 이내 파괴"하고 "서로를 두려워하라고, 공적 활동은 위험하고 골치 아픈 일이라고, 안전한 공간에 틀어박혀 살라"고 시민들을 몰아붙이고 억압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불어닥친 이후 사태다. 재난의 시작은 허리케인으로 인한 자연재해였지만 당국의 '이례적인 엘리트 패닉 탓에'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피해자들을 더럽고 음침한 슈퍼돔과 컨벤션센터에 강제로 몰아넣고서 자발적인 대피조차 막아 뉴올리언스를 '감옥'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모자라 '당국은 카트리나 피해자를 골칫거리나 괴물로 간주했고 …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사람들의 대피를 막거나,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음을 방조했다.' 이런 '엘리트 패닉'은 미디어를 조종해가며 재난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심각하게 망가뜨려버린다. 우리도 충분히 피부로 겪고 있는 일들이다. 이 책은 일상이 재난인 우리시대에 주는 기록으로도 읽힌다. 두 가지 교훈은 분명하다. 하나는 인간의 믿음과 행동에 따라 폐허에서도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시 주의해야 한다는 점. '혼이 비정상'이라고 우려하고 자빠진 소수 권력의 증상(과 그들이 일으키는 제2의 참사)은 딱 전형적인 엘리트 패닉이기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이 책의 원제는 <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 그대로 옮기면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라는 한국어판의 제목은 이 쓸모 있는 실업의 권리를 '누군가' 빼앗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 누군가로 일리치가 지목하는 것은 바로 '전문가'다. 이 전문가들은 시장 의존 사회에서 괜한 '필요'를 만들고, 이반 일리치의 표현을 따르면 '현대화된 가난'을 일으킨다. 이들 탓에 우리들이 쓸모없어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현대화된 가난'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보자. 책에 한 산모의 사례가 있다. 이미 두 아이를 낳은 이 산모는 셋째 아이를 출산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 두 번의 출산 경험이 있어 그다지 두려움은 없다. 산모는 병원에 머물던 어느 날 마침 태아가 나오는 걸 느꼈다. 간호사를 부르자 간호사는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곧 살균수건을 가져오더니 아기의 머리를 자궁 속으로 억지로 밀어 넣으며 산모에게 힘주지 말하고 한다. 왜냐하면 "레비 박사님(전문가)께서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화된 가난'의 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국민이 주택을 가질 권리를 법으로 선포한 날, 그동안 국민의 4분의 3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온 집이 하루아침에 마구간 취급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날 이후 자격증 있는 건축가가 그린 설계도를 제출하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집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이 또한 현대화된 가난의 사례다. 직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 고용되지 않은 상태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이 있는데, 이런 일들이 '노동시장'이 확장되면서 없어져버렸다. 그로 인해 직장 밖에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자유마저 사라진다. 이 또한 현대화된 가난의 사례다. 초고속 교통체계는 실상 대다수의 시민들이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게 만든다. 기상 캐스터(지금으로 치면 휴대전화의 날씨 어플) 없이는 날씨를 예상하지 못한다. 자동차는 두 다리가 버젓이 하던 일을 빼앗는다. 의무교육제도의 학교는 교육을 독점하고 바보 되기를 가르친다. 목마름은 콜라가 필요한 상태로 인식된다. 이런 일들 역시 현대화된 가난의 사례다.


일리치는 위의 예들을 들면서, '현대화된 가난' 현상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사람들이 중독되면서 문화에 스며든다고 지적한다. 현대화된 가난을 부추기는 것은 바로 '산업적 도구'다. 인간 사회가 유용하게 활용해온 '공생의 도구'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산업적 도구들이 삶을 장악하면서 그동안 개인과 집단의 자율성을 길러주던 환경과 조건 그리고 '삶'은 체계적으로 '몰수'된다. 그리고 '필요-만족의 관계'가 바뀌어버린다. 실제 삶에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상품처럼 만들어지면서, 그 괜한 필요를 얻어야 만족을 느끼는 기묘한 관계가 생겨난다. 이는 인간의 자율적 창조성을 빼앗고, 그 한 결과로 "시장 경제에서 배제되어도 생존할 수 있던 이들이 구매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가 물건을 사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체계적으로 강요를 당한다," 일리치는 이런 시장 의존을 영구화시키는 전문가 권력을 비판한다. 전문가는 생의 가치를 독점하고 제도화하는 권력 집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실업의 권리"란 '산업'의 그늘 바깥에서 자율적인 능력으로 자신과 타인의 삶을 유용하게 할 권리에 대한 표현이다. '괜한 가난'은 굶주림보다 더 지독한 삶의 벼랑길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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