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 8월 12일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자기 삶을 자유롭게 통치하는 세상을 이룩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사회 이론은 무엇인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앞서의 질문에 답하고자 자율적 공생(共生)의 원리와 기술을 일깨우고 인간에 대한 신뢰를 되찾게 해주는 이론으로서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창안한다. 이 책이 담고 있는 것은 이 독창적인 신생 이론을 위한 사유의 단편들이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이라는 이름이 낯선 까닭은, 이 말 자체를 그레이버가 창안했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 인류학은 우선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의 어떤 시점에 존재하게 될지 모르는 어떤 이론"으로 구상되었다. 이처럼 도래하지 않은 것을 '미리' 창안하는 것은 아나키스트 운동의 주요 원리이기도 한 '예시적 정치'와 유사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것은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형식의 사회성을 창출하여 이미 자유로운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직접행동의 원리"라고 설명되는데, 즉 살고 싶은 방식으로 곧장 살아나가는 일종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 이론, 특히 자치를 위한 사회 이론과 인류학이 어떻게 어울린다는 건지 자못 의아하다. 인류학 하면 흔히 민속 사료를 살펴보고 원시부족들을 관찰하는 모습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인류학의 주요한 연구 방법인 민족지학(ethnography)은 실제로 특정 문화권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 생활상의 맥락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레이버의 목적은 민족지학의 연구 방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아나키즘의 방식과 긴밀히 연결시키며 근본적인 질문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서구 사회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졌는데,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자주 소개된다. '직접행동 네트워크' 모임과 '세계정의 운동'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고, 그 탓에 예일 대학교 재임용이 거부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2011년 월가를 점거했던 오큐파이 운동에 깊이 참여하며 "우리는 99%다"라는 구호를 작성했던 활동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보는 그의 사유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고급의 이론보다 항상 실천에 방점을 둔다.
그가 이 책에서 아나키스트 인류학을 통해 제시하는 이론 및 실천의 핵심은 "낡은 사회의 껍질 안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일이 가능하며 "실존하는 대중적 실천이야말로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미래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주요 도구는 상호부조와 자기조직화이고, 이를 역사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바로 인류학이다.
인류학은 곧잘 옛날 이야기로 치부되고, 아나키즘은 자주 순진하고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 현대사회처럼 갈등이 고도화되고 이전 시대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주의를 경험한 인류에게는 '좋았던 옛 시절' 따위는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는 식이다. 그런데 그레이버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삶은 양적으로는 변화했지만 질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인류가 기술이나 사회체제를 고도화시켰지만 그렇다고 "오래된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그 '오래된 가능성'이란 무엇보다 '전환'을 가리킨다. 인간사의 유구한 진실은 다름 아닌 "사회는 끊임없이 재탄생한다"는 사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