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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11월 11일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 '야만'이란 무엇일까? 또 그와 상대되는 '문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흔히 쓰는 말들이지만 막상 따져서 설명하려면 쉽지 않다. 대신 야만과 문명이라는 말에 자연스레 따라붙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헐벗은 몸에 요상한 장신구를 걸치고 조악한 도구를 사용하는 '야만인'과 깔끔한 옷을 입고 세련된 행동거지를 하며 첨단의 물건을 사용하는 '문명인'의 이미지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비가 있다. 야만인의 사고는 비합리적이고 비역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문명인의 사고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대비가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이런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이 꼬집는다. "누구나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을 야만적인 것으로 부른다." 요컨대 다들 자기는 '문명'이고 남은 '야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인류학자이며 '구조주의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우리가 별다른 의심 없이 원시사회를 '야만'이라고, 혹은 '미개'하다고 치부하는 선입견이 얼마나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깊이 파고든 인물이다. 특히나 원시사회를 미개한 사회로 바라보는 서구사회의 독단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학문적으로 비판한 것이 그의 주요한 업적이다. 그는 20세기 중후반을 풍미한 '구조주의'라는 사상의 조류를 이끌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는 1908년에 태어나 2009년에 사망한 레비스트로스의 유작이다. 앞서 적은 레비스트로스의 주제, 즉 '원시적이고 태곳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가 결코 미개하지 않으며, 복잡하고 첨단 사회라고 해서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그의 화두는 실상 그가 이미 1962년 출간한 대표작 『야생의 사고』에서도 개진한 생각인데, 50여 년 후에 펴내는 만년의 글에서도 동일한 주제가 변주된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표제작의 제목처럼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라는 주장에 이른다. 식인 풍습을 가진 원주민은 식인종이고, 우리 문명인은 식인종이 아니라는 생각은 엄밀히 보면 착각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병 치료를 목적으로 뇌하수체 주입 수술을 하고, 뇌물질을 이식하는 수술, 흔하게는 장기 이식 수술이 행해지는데, 이러한 행위들이 이뤄지는 논리와 작용이 원주민이 식인 풍습을 행하는 이유나 논리와 동일 차원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에도 '식인 풍습'은 형태를 달리한 채 남아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분석이다. 그래서 식인 풍습을 멈춰야 한다는 것이 글의 결론일까? 레비스트로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식인 풍습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자는 것이 아니라, '야만'과 '문명'을 가르는 통념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적은 대로 레비스트로스가 강조하는 것은 원시사회와 현대의 복잡한 사회 중에 어떤 사회가 더 우월한지의 차원이 아니다. 그는 이러한 우열 가리기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양자를 가르는 표현 또한 '야만/문명' 따위가 아니라 '차가운 사회/뜨거운 사회'가 적당하다고 제안하기도 한다. 즉 원시사회는 '차가운 사회', 복잡한 사회는'뜨거운 사회'로 부르자는 것으로서 두 사회 간에는 좋고 나쁨의 평가가 무색한 다만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방식으로 집요하게 주도적인 통념들을 재고해나간다. 우리 안의 통념을 해체하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금처럼 한치 앞도 살피기 어렵고 갈수록 발밑이 어두워지는 기분이 드는 세상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눈을 밝혀야 할 것이다. 20세기 말에 적은 한 글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조언을 나눠준다. "멀리 떨어진 것이 가까운 것을 밝혀주지만 가까운 것도 멀리 떨어진 것을 밝혀줄 수 있다."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우치다 타츠루, 오카다 도시오 지음 이 책에서 대담을 나눈 우치다 타츠루와 오카다 도시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둘 모두 '공동체'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점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의 이름난 사상가임에도 독특하게 개풍관(凱風館)이라는 무도관을 운영하고, 오카다 도시오는FREEex라는 회사를 운영한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조직을 공동체로서 꾸려나가고 있다. 먼저 개풍관을 조금 더 소개하면, 이곳은 '무예를 배우면서 배움을 얻는 공동체'다. "문하생은 150명 정도로 일주일에 6일은 무예를 연마하고, 하루는 세미나를 열어 현대 정치나 경제, 문화를 논한다." 무도관인 동시에 인문학 교실인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는 이곳에서 제자 및 동료들을 만나 어울리며 그들에게 자신의 무예와 학문을 '나눠준다.' 오카다 도시오의 FREEex는 후원자 제도로 운영되는 독특한 회사다. 190명 정도 되는 사원들이 돈을 내 대표 오카다 도시오에게 월급을 준다고 한다. 오카다 도시오는 자기를 믿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신세를 진다'. 베풀거나 신세를 지는 것은 다름 아니라 공동체가 굴러가는 데 있어 기본이 된다. 여기서 우치다 타츠루와 오카다 도시오가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단자화된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극복할 방법이 이러한 공동체성의 회복 및 복구라는 점이다.현 시대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되는 대로 베풀고 신세 지는 '공동체'라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기였던 지난 시절에는 잠시나마 평화와 번영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혼자서 해나갈 수 있을 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대는 끝나버렸다." 게다가 "대화의 공통 기반이 사라진 사회, 욕망을 거세해버린 젊은이, 존경을 잃어버린 연장자, 교육을 포기한 학교, 성과주의라는 괴물이 만들어놓은 참담함"이 우리 사회의 풍경이 되었다. 저자들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들은 사회가 풍요롭고 안전해지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겠다는 착각에 빠진 탓에 "친족을 해체하고, 지역공동체를 해체하고, 종신고용 기업 같은 중간 공동체도 해체하여 최종적으로 모두 고독해졌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극복하기 위해 "작은 커뮤니티를 조물조물 만들어나가"길 권한다. "저 혼자서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남이 나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는' 삶을 사는 것보다 집단적으로 살아가며 '신세를 지거나 남에게 베푸는' 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자 방법으로 드는 것이 '증여'이다. 증여란 간단히 말하면 내가 줄 수 있는 무언가를 남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특히나 댓가를 바라는 선물과는 다르게, 댓가가 없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건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축구에서의 패스(pass)와 같다고 설명한다. 댓가를 바라는 심정 없이 패스를 해도 결국 공은 돌고 돌다 나에게 굴러온다. 공을 주고받는 패스를 거듭하며 모두가 누리는 전반적인 플레이는 향상된다. 나 자신도 그 안에서 훈련을 쌓고 실력이 나아진다.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이 증여, 즉 순환을 향한 패스라는 것이다. 내가 독차지하지 않고 '골'을 남에게 넘기면 손해 아닌가? 하지만 내 발에 걸린 공일지라도 누군가 덕분에 내게 잠시 굴러온 것이지 결코 '내 것'이 아니다. 제 몫을 독차지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비롯해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것이 저자들의 논증이다. '내가 가진 것은 내 힘으로 손에 넣었으니까 배타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내게 있다'는 생각은 어떤 경우에도 착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공동체를 유지할까'라는 경험지(經驗知)의 소중함을 잊어버렸습니다. 돈만 있으면 필요한 것은 전부 시장에서 상품의 형태로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뼛속 깊이 돈, 돈,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그런 단순한 삶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통렬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선 '돈'이 없으니까요. 둘째는 '정말로 필요한 것,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나와 오카다 씨가 주목한 '위기'는 상당히 심각합니다. 물론 독자 여러분은 이 대담을 웃으면서 읽으셔도 상관없지만, 잠시 동안만이라도 책에서 손을 떼고 '내가 살아남기 위한 공동체'는 어떤 것일까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맺음말」에서 이 책은 '돈'이 없어 위기라는 사람들을 향해 '정말로 필요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한다. 편안한 말투로 이어지는 대담집이지만, 단순한 언어로 전하는 지혜가 꽤 묵직하다.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노먼 포터 지음 필자는 책 만드는 일을 하는데, 원고를 편집하는 일과 함께 책 디자인도 맡고 있다.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펴내는 책의 편집·디자인이 주된 일이며, 이따금 다른 출판사의 책을 디자인하기도 한다. 외주 디자이너 일을 겸하는 것이다. 2010년 우연한 기회에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제대로 실력을 갖추기도 전에 무턱대고 일을 시작한 터라 내내 좌충우돌이었다. 특히나 현장의 책 디자이너 대다수가 시각디자인 혹은 산업디자인 전공자인 데 반해 미술 교육 한번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처지여서 무언가 간단한 작업을 하더라도 자신이 없어 애를 먹었다. 그런데도 책 디자인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글자 빼곡한 '원고'가 책이라는 손에 쥐어지는 '물건'으로 탈바꿈하는 일이 늘 너무도 신기해서였다. 그 과정에 편집자로서만이 아니라 디자이너로서도 참여하고 싶었다. 책 디자이너는 저 신기한 '탈바꿈'을 도모하는 사람이니까. 야심은 그랬으나 막상 작업은 막막함의 연속. 그래서 디자인 프로그램 자습서부터 시작해 디자인 분야 도서라면 되도록 많이 찾아 읽었는데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는 보자마자 단연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보통은 '디자인'이 무언지를 논하면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같은 제목을 내거는데 이 책은 생소하게도 '디자이너'가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아닌가. '디자인'을 어떻게 할지만을 고민했지 어떤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고민은 해보지 않은 터라 저런 질문이 은근히 신경을 자극했다. <디자이너란 무엇인가>의 저자 노먼 포터는 1923년생 영국인으로 디자이너이기 이전에 목수이자 시인이자 교육자였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을 계기로 아나키즘적인 지향을 가졌다고 하며 30대부터는 영국 어느 소도시에서 작업실을 운영하며 지내다 훗날 미술대학 교편을 잡기도 한다. 저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선은 현장 디자이너이면서도'전업 디자이너'가 아니라 목수 및 시인으로 살았다는 점과 교육자로서 디자인 교육에 힘쓴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저자의 성향과 특징이 상당히 잘 스며들어 빛을 발하는 책이 바로 <디자이너란 무엇인가>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말하는 디자이너의 정의란 무엇일까. 1장의 첫머리가 이러하다.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을 덧붙인다. "행동을 구상하고 나서 실천 수단을 마련하기 전에, 그리고 결과를 가늠하기 전에, 잠시 멈추고 신중히 고민할 필요가 있는 활동 영역에는 모두 그들이 있다." 즉 일과 일 사이에 멈춰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는 일이 모두 '디자인'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 모두 '디자이너'라는 말이다. 이 책에는 산업 현장에서 뛰는 디자이너들을 향한 조언도 많은 만큼, 사실상 소수의 디자인 종사자를 위한 책일 수도 있다.하지만 첫머리에서 강조하듯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라는 생각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및 사람들과 협력해가는 기술들을 탁월하게 풀어낸다.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바는 다음 문장과 같다. "디자인은 결정이나 결과 못지않게 관심, 반응, 질문과도 연관된 분야"라는 것이다. 저자는 디자인이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산출하는 일인 동시에,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디자인이 관심을 기울이고 반응을 주고받고 질문을 찾는 일임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디자이너'라고 설명한 이후 그는 다시 디자이너는 (나이를 불문하고) '학생'이라고 표현한다. 탐문하는 자세를 갖자는 것이다. '디자이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책은 결국에 가서는 뜻밖에도 '좋은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환기시킨다. 분명 디자인 교과서인데 어찌 읽으면 인생 교과서라고도 할 수 있는 색다른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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