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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미루야마 겐지 지음 일본 작가 미루야마 겐지는 1943년 생으로, 20대 무렵 무역회사를 다니다가 발표한 <여름의 흐름>이라는 작품으로 아쿠타가와상이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으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알렸다. 그리고 스물다섯의 나이에 나가노 현 아즈미노라는 동네로 귀촌한다. 이후 문단과는 일절 관계를 끊고 창작에만 전념한다. 독특한 행보인 셈인데, 글의 스타일 역시 거침없고 결연해서 그 점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꽤 있다. 이 책도 제목부터 거침없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과연 무엇을 두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까. 시골생활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열병처럼 당신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혹 당신은 도시에서 누리지 못한 모든 것을 시골에서 얻을 수 있다는, 그야말로 망상에 가까운 환상을 품고 있지 않은가요. (...) 당신은 도대체 시골이란 곳을 얼마나 깊이 파악하고 숨겨진 정보를 얼마큼 얻고 나서 그렇게 대담하고 유치한 결단에 이른 것인가요.


'그런 것'이라는 표현의 속뜻인즉, 시골생활에 대한 환상을 말한다. 결국, 시골은 뭘 모르는 당신의 머릿속에나 있는 그런 낙원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실로 책 내용 역시 환상을 깨부수기 위한 사례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특징이자 재밌는 점은 지은이가 독자에게 해주는 말들이 인생 선배로서의 친절한 조언이거나 마음을 담아 건네는 배려이거나 하는 게 아니라 시종일관 매우 신랄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때로는 읽다가 실소가 나올 만큼 매우 구체적으로까지 시골생활을 흉보고 있다. 목차를 훑어만 봐도 충분히 짐작될 정도로. 이를 테면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시골에서는) 구급차 기다리다가 숨 끊어진다" "자원봉사가 아니라 먼저 자신을 도와야 한다" "(시골은) 고요해서 더 시끄럽다" "깡촌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가능한 큰 개를 길러라" "(범죄자들이)군침을 흘리며 당신을 노리고 있다" "돌잔치에 빠지면 찍힌다" "모임에 도시락을 대주면 (선거에서) 당선" "친해지지 말고 그냥 욕먹어라" "이주자들과만 어울리면 사단 난다" 등이다. 이 책은 읽기에 따라, 어느 대목은 통쾌한 생각 같기도 하고, 때로는 별 생각 없이 끄덕이게도 되고, 어떤 때는 꽤나 불편하기도 하다(아니, 자기가 뭐라고 시골을 이토록 흉보는 거야!). 그런데 다 읽어갈 무렵 새삼스레 든 생각은 이랬다. 작가 자신이 밝히듯 이 책은 '뭣도 모르고 시골생활을 염원하는 이들을 위해 쓴' 글인 것은 분명한데, 한편으로는 어떤 섣부름도 없이 시골생활을 해가자는 결연한 각오처럼도 여겨진다. 고백하자면, 책을 펼치면서 애초에는 시골이 '이런 거다' '저런 거다'를 단언하는 자체가 섣부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가서는 그런 인상은 오히려 희미해졌다. 작가는 결국 섣부른 환상은 걷고 대신 그 자리를 '진정한 빛', '진정한 감동'으로 채우자고 말하는 듯하다. 책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송라인> 브루스 채트윈 지음 / 현암사 / 2012년 이 책은 여행기이자 소설이다. 사실 장르가 명확하지 않다. 작가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돌아다니며 적은 기록인 터라 일단 여행기로 보이지만, 간혹 허구로 보이는 대목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작가가 다른 책에서 가져온 문구와 짤막하게 적은 단상들을 맥락 없이 툭툭 넣기도 했다. 장르가 불분명한 이유다. 사정이 이런 탓에 서점에서 이 작가만을 위한 서가로 '뉴논픽션 코너'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갑작스레 독자들 앞에 나타나 낯설고 강렬한 여행기 두 권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난 작가. 이 작가는 존 업다이크로부터 "종이 몇 장에 세상을 담은 작가"라는 칭송을 받은 브루스 채트윈이다. 브루스 채트윈이 작가가 되기 전에 하던 일은 미술품 감정사였다. 18세 어린 나이에 소더비스 사의 경비로 취직한 것이 경력의 시작. 그러다 미술품을 보는 감식안을 인정받아 이내 감정사로 발탁된다. 그리고 몇 해만에 이사 자리에 오르고 소더비스 사의 명성을 이끄는 주요 인물이 된다. 하지만 시력에 문제가 생겨 소더비스 사를 그만두고 나서는 예술 분야를 취재하는 기자로 경력을 시작한다. 그러다 1974년 사고(?)를 친다. 어느 날 다니던 직장에 "6개월간 파타고니아로 떠남"이라는 짤막한 전보 한 통을 부치고 남미 대륙 파타고니아로 홀연히 떠난 것이다. 그때 여행의 성과가 그의 첫 작품 <파타고니아>이다. 채트윈은 이 책으로 "여행 문학은 브루스 채트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라는 칭송까지 얻게 된다. 채트윈은 사실상 이때부터 인간의 삶의 양식은 본질적으로 거주보다 유목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피력한다. 그의 삶의 뚜렷한 화두는 내내 노마드, 즉 '유목하는 삶'이었다. <파타고니아> 이후 10년 후 펴낸 생애 두 번째 여행기가 <송라인>이다. <송라인>에는 유목하는 삶에 대한 인류학적 혹은 철학적 탐사가 담겨 있다. 배경은 앞서 적었듯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여기서 채트윈이 뒤쫓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인 애버리지니들이 섬기는 '송라인' 즉 '노래의 길'이다. 송라인은 애버리지니들이 믿는 창조 신화이다. 애버리지니들은 태초의 조상들이 대륙을 돌아다니며 세상 만물을 만났고, 그것들의 이름을 노래로 부름으로써 비로소 창조가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태초의 조상들은 대륙을 떠돌며 새를 만나면 새를 노래로 부르고, 개미를 만나면 개미를 노래로 부르고,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노래로 불렀다. 그렇게 노래로서 세상을 창조해간 발자취가 있는데 그것이 '송라인'이다. 더 신비로운 일은 후대들의 의식과 문화이다. 애버리지니들의 삶의 중대한 목표는 조상들이 창조한 땅을 "본디 상태이자 있어야만 할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혼을 다해 다음과 같은 의식을 거듭했다. 자신이 믿는 조상의 송라인을 따라 걸으며 "단어 하나, 음 하나 바꾸지 않고 조상의 시구를 부른다. 그리하여 창조를 재창조한다." 조상들을 따라 대지의 거죽 밑에 있는 '생명 있는 것'들을 모두 노래로서 (재)창조해야 한다는 소명. 이것이 애버리지니들이 섬기는 전통인 것인데, 실제로 이들은 위와 같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소명에 따랐다고 한다. 조상의 송라인을 좇으며 전수받은 노래를 부르는 것. 그래서 만약에 송라인으로 섬기는 실제 지형이 무너지거나 파괴되면 생명을 잃는 것처럼 고통을 느꼈다. 노마드를 탐구하던 채트윈은 저곳에서 이와 같은 인류의 문화를 만났다. "본디 상태로 있게 하려는" 소명. 그리고 노래로서의 (재)창조. 지금 우리에게 저처럼 아름다운 노래가 있던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리베카 솔닛 지음 책의 저자는 리베카 솔닛. 올해 출간된 화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솔닛이 2010년에 출간한 책이다. 저널리스트로서 인권, 기후변화, 반전, 반핵 문제 등에 천착해온 솔닛은 이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저술가이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재난 탐사기'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까지, 지난 100여 년간 일어났던 다섯 건의 대형 재난을 탐사한다. 탐사의 결론에는 반전 아닌 반전이 있다. 그 하나는 대재난에 처한 인간이 이럴 것이라는 통념 - "재난 시 인간은 상실과 고통과 비애에 사로잡히고, 사회는 약탈과 파괴와 살인과 폭동의 디스토피아로 변할 것이다" - 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재난에 처하면 "사람들은 기존 사회질서가 무너진 이 폐허 속에서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가치에 의문을 갖고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응시하게 되며", 평소보다 훨씬 이타적인 인간 본성이 두드러지고, 스스로 자율적인 재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따뜻한 연대와 상호부조를 꽃피운다는 것이다. 재난은 인간의 믿음과 행동에 따라 '재난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여러 재난의 역사를 더듬고, 관련 자료들을 연구하고, 수많은 재난 경험자의 육성을 듣는 작업을 거쳐 제기하는 이 책의 파격적인 주장이다. 또 하나 반전 아닌 반전은, 그렇다면 공포로 범벅된 재난에 대한 저 디스토피아 이미지를 생산하고 퍼뜨리는 세력이 누구냐는 것이다. 그 세력은 바로 '엘리트'들이다. 재난 시 누구보다 먼저 '패닉(공황)'을 일으키는 소수의 권력자들. 이들은 자신들 외의 일반 시민들이 공항에 빠져 폭동을 일으킬 거라는 상상의 공포 탓에 '엘리트 패닉'을 일으킨다. 결국 자신들이 수호하는 질서가 무너지는 게 두려워서 시민들을 폭력으로 통제한다. 그리고 "재난 속에서 서로 돕고자 연합한 이들의 공동체를 이내 파괴"하고 "서로를 두려워하라고, 공적 활동은 위험하고 골치 아픈 일이라고, 안전한 공간에 틀어박혀 살라"고 시민들을 몰아붙이고 억압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불어닥친 이후 사태다. 재난의 시작은 허리케인으로 인한 자연재해였지만 당국의 '이례적인 엘리트 패닉 탓에'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피해자들을 더럽고 음침한 슈퍼돔과 컨벤션센터에 강제로 몰아넣고서 자발적인 대피조차 막아 뉴올리언스를 '감옥'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모자라 '당국은 카트리나 피해자를 골칫거리나 괴물로 간주했고 … 많은 경우 사람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거나, 사람들의 대피를 막거나, 사람들을 죽이거나, 죽음을 방조했다.' 이런 '엘리트 패닉'은 미디어를 조종해가며 재난에 대한 합리적인 대응을 심각하게 망가뜨려버린다. 우리도 충분히 피부로 겪고 있는 일들이다. 이 책은 일상이 재난인 우리시대에 주는 기록으로도 읽힌다. 두 가지 교훈은 분명하다. 하나는 인간의 믿음과 행동에 따라 폐허에서도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시 주의해야 한다는 점. '혼이 비정상'이라고 우려하고 자빠진 소수 권력의 증상(과 그들이 일으키는 제2의 참사)은 딱 전형적인 엘리트 패닉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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