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플랫폼P 연재 2화]


이번에는 ‘기획’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기획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일을 꾀하여 계획함’이라고 나옵니다. 기(企)자가 ‘꾀하다’ ‘발돋움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 ‘계획’의 뜻을 찾아보면 ‘앞으로 할 일의 절차, 방법, 규모 따위를 미리 헤아려 작정함. 또는 그 내용’이라고 나옵니다. 이 뜻풀이를 통해 새삼 이러한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기획’이라는 말뜻에 충족하려면, 꾀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되고 꾀한 것을 어떻게 해낼지 헤아리고 작정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때 헤아리는 과정에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조사하고 탐색하는 수행이 필요하겠지요. 기획과 계획을 위해서는 꼼꼼한 ‘조사’가 필수입니다.


조사와 탐색은 마침내 지도를 만들 수 있게 해줍니다. 지도란 일단은 목적지에 틀림없이 도착하도록 돕는 물건인데요, 의외로 방랑에도 도움이 되는 물건입니다. 그러니 길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도를 마련해야 하는 법. 어떠한 여정을 고려하고 있든 지도가 있으면 좋습니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하는 우리 가방 안에는 아직 지도가 없지요. 그러니 출발 전에 지도를 하나 그려야 합니다. 남이 준 지도보다 쓸모 있는 것은 내가 공들여 그린 지도이고요.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지도 제작술’을 알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지도 제작술 기획의 영역에 발을 내딛기 전에 앞으로 수시로 펼쳐서 확인할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 지도 제작술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도 제작술이라고 하니 쓸데없이 거창해 보이는데 사실 말하고 싶은 바는 단순합니다. 좋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여행에서 바라는 게 무언지를 잘 알고, 내가 돌아다니는 여행지가 어떠한 땅인지 제대로 파악해야겠지요. 기획도 비슷합니다. 내 욕망을 잘 알고 해당 분야를 잘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일을 돕는 유용한 습관 혹은 태도가 있습니다.


1) ‘큰 거 한 방’은 금물 일단 피해야 할 사고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큰 거 한 방’이라는 생각입니다.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출판사를 설립하고 운영을 막 시작했을 때 한 선배 출판인이 해주신 이야기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선배가 해준 이야기라 그런지 오래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그 선배도 출판사를 설립한 초기에 헷갈리고 모르는 게 하도 많아서 주변 창업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모르는 걸 자주 물었다고 해요. 그때 어느 분이 그 선배에게 이런 조언을 했다고 합니다. “세금이니 제작이니 유통이니 죄다 걱정이지? 근데 고민을 한 방에 없애는 방법이 있다는 거 알아? 큰 거 하나만 터뜨리면 돼!”


사업을 사업답게 운영하는 요령을 묻는 새내기에게 자잘한 고민은 그만하고 ‘큰 거 한 방’ 터뜨릴 궁리를 최우선으로 하라고 조언한 것이지요. 물론 정말 그럴 수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하나면 자잘한 고민은 다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출판사를 시작한 이유가 ‘베스트셀러 하나’가 아니라면 여전히 큰 그림과 실행안들이 필요합니다. 큰 그림과 나의 좌표와 주요 실행안들을 기록한 종이. 저는 그런 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라고 생각합니다.


2) 새의 눈으로 지도 제작을 위해서는 먼저 하늘 높이에서 영토 전체를 조망해 봐야 합니다. 새의 시선에서 우리가 속한 땅, 즉 출판의 지형을 바라봅니다. 출판의 지형은 ‘출판 분야’라는 말로 구획돼 있습니다.


이렇게 높은 시선에서 조망하는 일은 도서관 혹은 오프라인 서점을 거닐면서, 아니면 온라인 서점의 웹페이지를 보면서도 할 수 있습니다. 이때는 책 한 권 한 권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출판 분야들부터 살펴봅니다. 출판에는 분야가 있지요. 크게는 어린이 / 인문 / 역사 / 사회과학 / 자연과학 / 문학 / 자기계발 / 예술 / 건강 / 취미 등의 분야가 눈에 띕니다. 가만 보면 이 분야들이 다시 나뉩니다. 문학 분야의 경우 시 / 소설 / 에세이 / 희곡 등으로 나뉩니다. 이는 재차 나뉠 수도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한국소설 / 영미소설 / 유럽소설 / 일본소설 등처럼 언어별로 나뉘기도 하고, SF / 판타지 / 로맨스 / 공포 등처럼 장르별로 나뉘기도 합니다. 이처럼 출판에는 분야가 존재하고 이 분야는 이미 세세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도서관의 서가 정리를 살펴보거나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 구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온라인 서점의 카테고리로도 확인할 수 있지요. 이처럼 출판 분야부터 꼼꼼히 봐야 하는 이유는, 내가 주로 뛰놀 놀이터가 어딘지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출판 분야는 세세한 차원에서 정할수록 좋습니다. 두루뭉술하게 ‘문학’이라고 정하지 말고, ‘한국 작가의 SF 소설’ 혹은 ‘동물권 주제 에세이’ 혹은 ‘기후변화 다룬 자연과학’처럼 세밀하게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밀한 출판 분야들을 다수 선택해 나가면서 분야가 폭넓게 확장돼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두더지의 손으로 앞에서 새의 시선으로 영토를 살펴봤다면, 이번에는 땅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제 땅의 표면과 땅속까지 탐색할 차례입니다. 출판 분야를 정하는 것은 내가 활동할 영역을 아는 일의 시작이지요. 분야를 정한 뒤에는 그 분야에서 어떤 출판사들이 활약하는지를 살펴봅니다. 그 출판사들은 경쟁자이자 협력자가 될 곳들이니 잘 알아둬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좋은 경쟁자는 적이 아니라 좋은 협력자나 마찬가지라고요. 그들이 앞서 하는 일들을 잘 배워야 합니다. 먼저 이 터전에서 일해온 사람 혹은 회사의 방식을 배우는 것은 새내기에게 너무나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정말이지 다양한 것을 살필 수 있습니다. 몇 가지만 들어볼까요


해당 회사의 운영 방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판권을 보면 발행인 포함 직원 구성을 알 수 있지요. 몇 명의 노동자가 어떠한 업무 분담으로 일하는지 대략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확인한 뒤에는 해당 출판사가 얼마의 간격으로 책을 펴내는지도 조사해 봅니다. 일 년에 몇 종을 내는지, 얼마의 시간 간격으로 내는지 따져봅니다. 일하는 사람 수에 비해 책이 많이 나온다면 외주 시스템을 활용한다고 짐작할 수 있겠지요. 온라인 서점에 가서 그 출판사 책들의 세일즈포인트도 알아봅니다. 세일즈포인트가 판매 성과를 정확히 반영하는 자료는 아니지만 이것으로 시장 반응을 대략 참고할 수는 있습니다. 특히 시장 반응이 좋았던 책들의 경우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지요. 세일즈포인트가 낮은 책들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출판사들은 좋은 판매 성과를 예상할 수 없음에도, 그걸 알면서도 책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책들이 출판사의 지향이나 성격을 보여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책이라고 여겨지면 더욱 꼼꼼히 살펴봅니다. 이는 재밌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이 출판사는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이런 책을 만들고 싶구나, 그러면서 손해를 메우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벌였구나, 하는 걸 알아보는 일도 가능합니다.


회사마다 디자인의 경향이 존재합니다. 표지의 모습을 쭉 모아서 살펴보면 그 회사가 익숙한 느낌을 추구하는지, 낯설고 새로운 느낌을 추구하는지, 장난스런 느낌을 좋아하는지, 어려워 보일지라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좋아하는지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스타일이 섞여 있더라도 어떠한 경향이 발견될 수밖에 없지요. 디자인의 경향 역시 주요한 출판 전략 중의 하나입니다. 출판사마다 어떤 디자인 경향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주의 깊게 보면서 자신은 어떤 전략을 취할지, 어떤 디자인 경향을 추구할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야기할 마지막 내용일 것 같습니다. 두더지의 자세로 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은 바로 저자와 역자 풀(Pool)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토를 찾았다면 다음으로는 그곳에서 누가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지 알아야겠지요. 관심 출판 분야를 조사하고 해당 분야 출판사들의 출간 목록을 탐색하는 일을 통해 우리는 반드시 관심 저자 목록을 만들어야 합니다. 관심 저자의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 일단 해당 분야의 베스트셀러 저자가 관심 저자 물망에 오를 가능성이 크겠지요. 하지만 베스트셀러 저자의 책은 식상할 가능성도 큰 법이고 그러한 기획은 수월하게 이뤄질 리가 없습니다. 다양한 기준을 가지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나의 관심 분야에서 읽고 싶은 책을 펴내는 저자, 읽어야 하는 책을 쓰는 저자, 이런 기준에 맞는 저자라면 반드시 관심 저자 목록에 이름을 올려야겠지요.


관심 저자 목록을 만드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저희가 이 땅에서 할 일이란 결국 그들의 활동지를 자꾸 찾아가고, 이야기 나누고, 집필을 도모하고, 그 결과로 책을 만드는 일이니까요. 목록을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는 그들의 책을 찾아 읽습니다. 관심 저자가 게시하는 글을 구독하고, 할 수 있다면 그의 SNS에도 찾아가 봅니다. 그의 관심사를 알아내고, 활동들을 꾸준히 ‘팔로우’하고, 그러면서 그 저자와 내가 무엇을 같이 할 수 있을지를 자주 상상해 봅니다.


해외 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인터넷에 활동상이 남는 일이 많지요. 여러 방법으로 그의 활동을 추적(?)합니다. 아마존(Amazon) 서점에서 저자를 검색해 신간 알림을 걸어놓고, 굿리즈(Goodreads) 등에서 서평을 찾아 읽습니다. 이런 조사를 하다 보면 내가 주목하는 관심 저자와 관련한 인물로 누가 자주 언급되는지, 그를 자주 인용하는 다른 전문가는 누구인지 등을 새롭게 알게 됩니다. 그럼 이 역시 목록에 정리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자꾸 상상을 합니다. 그와 내가 무얼 같이 할 수 있을지.


저도 당연히 관심 저자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래 작성해 온 긴 목록의 첫 줄에 이름을 쓴 저자는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입니다. 그의 책 『가치 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이라는 책을 읽고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제가 좋아하는 몇몇 필자가 그를 자주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 관심을 키웠지요. 그의 책들을 빠짐없이 찾아 읽으면서 그의 책을 만드는 일을 수시로 상상했습니다. 그의 책 중에 어떤 책부터 번역하면 좋을지, 번역은 누가 하면 좋을지, 해제가 필요한지, 추천사는 누구에게 부탁할지, 그런 것들을 자꾸 생각했는데 그게 결국은 ‘기획’이었습니다. 마침내 2016년에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이라는 책을 번역해서 펴냈습니다. 이 책 출간이 발판이 되어 이후에 정치학자 하승우 선생과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책을 만드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고,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하는 아나키즘에 관심을 가진 한국의 여러 활동가 및 연구자들과 사귀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다시 후속 기획으로, 또 생각지도 못한 인연들로 이어졌고요. 그래서 2020년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무척 슬펐습니다. 당시 그레이버와 교분이 있는 활동가들이 멋진 장례식 축제를 준비했는데 뜻밖에도 제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그레이버에게 편지를 쓰자는 제안이었지요. 처음에는 짧은 인사를 남길 생각으로 무심히 제안을 수락했는데, 막상 편지를 시작하니 너무나 많은 기억과 이야기들이 제 안에서 터져 나와서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를 지켜보며, 기획을 고민하는 일을 빌미로 그를 생각하며 지낸 시간이 그만큼 길었던 탓이었지요.


포도밭출판사는 지금도 인류학 책 출간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데요, 이런 걸 보면 여전히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영향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십여 년 전부터 시간 순으로 누적해서 적어온 관심 저자 목록에서 1번에 있는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영향력이 아직도 이정도인 걸 보면, 관심 저자 목록이 기획에 미치는 영향은 정말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지금까지 기획을 위한 지도 제작술을 이야기했습니다. 기획 자체를 이야기하는 데 이르지 못하고 기획에 앞서 알아둘 ‘조사 방법론’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벌써 분량이 훌쩍 넘고 말았습니다. 다음 연재의 주제는 ‘편집’인데요, 이번 글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자연스레 연결하면서 편집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2022년 10월 12일

2014년에 포도밭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나는 무척 신이 났다. 그때는 땡땡책협동조합이라는 곳에서 막 활동을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다. 그러니 더 신났을 것이다. 밖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면서 좋은 자극을 주고받고, 일상적으로는 내 가게(?)에서 일한다는 사실이 나를 그토록 신나게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당시의 나는 사람들의 멋진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이 책으로 보였다. 누군가 몹시 뜨거운 글을 쓰는 사람을 알게 되면 그에게 가서 나랑 뜨거운 책을 만들자고 청했다. 누군가 몹시 차가운 글을 쓰면 그를 찾아가 나랑 차가운 책을 만들자고 청했다. 누가 말을 단단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찾아가 나랑 단단한 책을 만들자고 청했고, 누가 다른 이의 말을 듣는 힘이 아주 강한 것을 알게 되면 그를 찾아가 나랑 듣는 힘이 강한 책을 만들자고 청했다.

잔뜩 신이 나서 ‘나랑 책을 만들자’고 청하는 나를 저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의 인상은 아마 이랬을 것 같다. 잘 웃는 사람. 뭐가 기분이 좋은지 많이 웃는 사람. 그때 찍힌 사진들을 보면 실제로 나는 늘 벌건 얼굴을 하고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게다가 몸을 세차게 흔들고 있는지 형체가 또렷하게 찍힌 사진이 드물다. 그리고 사진마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별한 포즈가 하나 있다. 행복이 절정에 달한 얼굴인 나는 한 손을 상대에게 쭉 내밀고 손가락 하나를 치켜올려 상대와 부딪히고 있다. 엄지 도장을 찍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멋진 모습이 보이면 꼭 그에게 같이 책을 내자고 졸랐고 그가 긍정적으로 응하면(혹은 아직 다 넘어온 건 아니더라도 여지가 보이면) 엄지 도장을 찍자고 요청했다. 나는 엄지 도장 방식으로 무척 많은 계약을 했다. 그렇게 맺은 계약 중 열에 여덟은 신성히(?) 이행되어 책 출간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만든 책들이 포도밭출판사의 출간 목록 중 절반을 훌쩍 넘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나도 나지만 저분들은 무슨 생각으로 엄지 도장을 믿은 걸까.

물론 정식 계약서를 안 쓴 건 아니다. 엄지 도장을 찍고 돌아와 구체적인 기획안이 오간 후에는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날인을 하고 계약금을 송금한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그럼 엄지 도장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정식 계약서를 쓰기 전까지의 ‘찜’ 같은 의미일까. 그저 장난이었을까. 돌아보건대 내게는 엄지 도장 자체가 의미 있고 중요했던 것 같다.

엄지 도장은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일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여 접근(!)한 분들 대부분이 출간 제안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멋짐이 책으로 엮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자주 되묻는 말이 있었는데 “망하면 어떡해요?”였다. 보통 망할 리 없다고 설득하는 게 맞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나 역시 지금 추진하려는 기획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새삼스레 망함이란 뭘까를 생각해 본다. 망함의 기준도 때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상당히 자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 출판에서 ‘망했다’고 할 때는 ‘책이 생각보다 안 팔리는 결과’를 일컫는 것일 텐데, 이때 책을 많이 파는 방향 대신 저 ‘생각’의 기대 수준을 낮추는 방향을 선택하면 구원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정말로 이 방향으로 일을 추진했고 저자를 설득했다.

“우리 돈 들어가는 거 없어요. 글은 당신이 쓰고, 편집이랑 디자인은 제가 할 거고, 종이값이랑 인쇄비에만 돈이 들어가는데 그건 300부만 팔아도 세이브가 돼요. 우리 책이 300부가 안 나가겠어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망할래야 망할 방법이 없어요. 걱정 말고 고고.”

이때 상대가 걱정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표정을 지으면 얼른 엄지를 내밀어 도장을 찍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돌아보니 약간 사기꾼처럼 ‘지속 가능’한 출판을 해왔다.

내가 해온 이런 출판 방식에는 난점이 있는데, 책은 많이 팔릴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저자와는 인연을 맺을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인 난점이다. 그리고 자기 책이 많이 팔리길 바라는 저자에게 출판사가 저러한 태도를 내보인다면 그 즉시 출판사 평가 점수가 마이너스 마이너스 마이너스가 되는 것을 넘어 저자에 대한 무례를 저지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당신의 압도적으로 훌륭한 책을 3,000부 아니 30,000부 책임지고 팔아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 책이 300부가 안 나가겠어요?”라고 한다는 것은 혼신의 노력을 다해 집필에 임하려는 저자를 모욕하는 말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곤란한 점이다. 그러니 결코 함부로 시도해선 안 될 일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껏 이렇게 함부로 해왔는지 모르겠네. 게다가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이런 방식은 대량복제생산이 덕목인 출판의 속성상 무척 치명적으로 몹쓸 방식이다. 이처럼 여러 곤란한 지점들이 있는데 이에 대한 내 입장은 이렇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깨닫는 것인데, 아마도 이제껏 나는 내가 아는 친구들의 멋짐을 증언하고 기념하기 위해 책을 만들어온 것 같다. 그리고 그걸 해내는 현실적인 방법으로는, 돈보다는 시간을 써서 일하는 방법이랄까? 책이 많이 팔리기를 바라기보다 안 팔려도 괜찮은 상황에서 일을 하려고 노력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점에 대해 미련이 생길 것 같으면 열심히 딴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어쩌랴’를 되뇌었다. 이렇게 못 미더운 나와 엄지 도장을 찍어주고 좋은 글을 써서 보내준 고마운 친구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책을 만들어왔다.

친구들의 멋짐을 증언하고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포도밭출판사는 이제 9년차다. 내년이면 10년을 채우게 되는구나. 내년에도 이 일을 계속 해내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래 미래 따위 없어도 잘만 살아왔다. 아직 희망은 있으니까 괜찮다.

내게 ‘미래 말고 희망’이라는 금언을 마음에 새기게끔 만든 사람은 바로 이반 일리치다. 이반 일리치는 어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반 일리치는 포도밭출판사에도 여러 모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이따금 포도밭출판사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으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다음처럼 답을 한다. “포도밭출판사가 있는 옥천이 바로 ‘포도의 고장’이고, 제 외삼촌도 옥천에서 포도농사를 하셨기 때문에 출판사 이름을 ‘포도밭’으로 지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가 맞기는 한데, 사실 그동안 별로 말한 적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서울을 떠나 옥천에 와서 출판사를 차리기 전에,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이반 일리치의 『텍스트의 포도밭』이라는 책을 펴내려고 기획했다. 생각보다 일찍 그 회사를 관둔 탓에 내가 편집까지 맡지는 못했지만 그 책은 다른 분들의 손길을 거쳐 얼마 후 멋진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비록 번역에 착수하기 전이었지만 이 책의 원서를 읽을 수 있었고, 거기서 읽은 ‘포도밭’의 비유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일리치는 12세기까지만 해도 ‘독서’란 지금과 같이 혼자된 공간에서 눈으로 글자를 읽는 일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인 곳에서 글자를 ‘소리 내서 읽고 듣는 행위’였다고 말한다. 당시 독서는 이렇듯 머리를 쓰는 일이 아니라 몸을 쓰는 일에 가까웠고, 함께하는 노동으로서의 의미가 무엇보다 컸다는 것이다. 여기서 되게 아름다운 묘사가 등장한다. 저 당시의 ‘독서’란 수도사들이 수도원에 속한 포도밭의 포도시렁 사이를 오가며 포도송이 열매들을 하나씩 음미하고 보살피는 ‘노동’과 같은 차원이었다고 한다. 단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인식하기로도, 행간들은 포도밭 이랑들이고 단어들은 포도 열매들이었다는 말이다. 포도나무 줄기가 양쪽으로 갈라진 모습을 일컫던 ‘스프레드’란 말은 오늘날 ‘펼침면’을 칭하는 말이 되었고, 처음에 포도시렁이 이랑마다 줄지어 드리워진 모습을 일컫던 파지나(pagina)라는 말은 오늘날에 와서는 쪽(page)이라는 단어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니 ‘포도밭’이라는 말이 너무 좋을 수밖에. 그래서 나는 출판사 이름을 포도밭출판사라고 짓는 데 전혀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반 일리치 할아버지는 충북 옥천의 한 출판사 이름이 ‘포도밭출판사’가 된 까닭이 자기 때문인 걸 알 리가 없고 나는 이런 일들이 무척 기쁘다.

그리고 내가 지금과 같은 ‘친구 중심’ 출판을 하게 만든 데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단어가 있다. 파구스(pagus)라는 라틴어. 파구스는 동네, 지역, 시골 등을 의미하며 ‘산책하고 싶어지는 경작지’라는 풀이도 있다. 앞에서 라틴어 파기나가 쪽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누군가는 파기나보다 파구스라는 말에서 쪽이라는 말이 가리킨 본래 의미를 짐작하기도 한다. 여기에도 꽤 그럴싸한 근거가 있다. 경계석으로 구분된 경작지(파구스)들을 산책하는 행위가, 쪽에서 쪽으로 건너가며 단어들을 음미하는 독서의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출판의 이상은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파구스적 의미의 쪽들을 만들어가는 것. 왜냐면 나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길 때가 좋다. 그러려면 책을 만들 때도 조금은 그처럼, 즉 어슬렁어슬렁한 마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다짐(?)들이 쌓여서 엄지 도장 방식의 계약을 낳았다고 문득 주장하고 싶다. 어느 한가한 날에 동네를 걷다가 우연히 친구를 만나 “야, 날도 좋은데 같이 산책이나 할까?”라고 말할 때처럼, 저자에게도 “오, 나랑 책이나 낼래요?” 하는 느낌으로 출판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쪽 한 쪽 만들어가는 것이 출판 일을 하면서 내가 지키는 희망이다.


최진규

충북 옥천에서 산다. 교정교열 일도 하고 북디자인 일도 한다. 출퇴근길에 보이는 화단의 식물을 휴대폰에 담는 걸 좋아한다. 요새는 날이 추워져서 꽃은 드물게 보이고 어디에나 배추가 많이 보인다. 아는 분은 아실 텐데 배추는 가만 보면 거대한 장미처럼…


* 『어떤 계약』(어떤출판연구회 발행, 2022년 10월)에 수록.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년에 자신이 진정 연구하고픈 주제는 “인간 없는 세상에 관한 인류학”이라고 했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연구야말로 인류학이 야심을 품고 연구할 만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데 실로 궁금하긴 하다. 인간 없는 세상은 어떻게 전개될까. 그리고 인간들이 사라진 ‘인류’에는 어떤 구성원들이 있을까. 잠깐, 그런데 인간 없이도 ‘인류’가 구성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을 두 발로 걷으며 도구를 쓰고 언어로 소통하고 사회 시스템 안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인간 입장에서의 규정일 뿐이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닫힌 상상력에서 조금만 벗어나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은, 동물 입장에서는 자신이 ‘인간’이다.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직역하면 ‘고기’]로 여기고 공격한다고.” - <숲은 생각한다>, 11쪽

아마존 강 유역에서 4년간의 현장연구를 통해 집필한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 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인간 중심적 사고’에 도전하는 인류학 저작이다. 위의 인용은 서문 첫머리에 적힌 일화인데 아마존 숲에 사는 존재들(원주민 후아니쿠와 재규어)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재규어는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다. 만약 반듯이 누워 있던 인간이 재규어 자신을 빤히 응시한다면 재규어는 인간을 ‘너’로 인식하고 가만히 놓아두지만, 엎드려 자는 인간은 먹기 좋은 고기로 여긴다는 뜻이니까. 원주민들은 이를 경험으로 알았을 것이고, 이러한 관찰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재규어와 인간이 숲에서 마주쳐서 살벌한 눈빛을 부딪칠 때, 고기(인간)을 보며 ‘너는 (나처럼) 인간인가, 고기인가’라고 묻고 판단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재규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이렇게 인간 중심적 사고틀의 맹점을 재고하고, 인식을 인간 너머로 확장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제시한다. 저자 에두아르도 콘의 결론은 존재 중에 ‘비인간’은 없으며, 모든 존재가 자기 내적인 맥락에서 ‘인간’이라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숲도 마찬가지. 그는 이 주장의 근거로 인간적인 것 너머의 ‘표상’을 탐구한다.

표상 행위란 모든 사고의 기초를 형성하는 작동이다. 소통의 도구가 ‘언어’라고만 생각하는 것 역시 인간 중심적 사고이다. 말과 글로 매개하는 소통은 ‘언어적 표상’의 결과일 뿐, 세상에 존재하는 기호 작용은 ‘언어적 표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책에서 제시하는 예로는, 아이콘적 표상,인덱스적 표상이 있다. 언어 같은 상징의 차원만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콘(표상하는 사물과 유사성을 공유하는 기호), 인덱스(표상하는 사물에 영향을 받거나, 상관관계가 있는 기호)를 통해서도 존재들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나뭇가지처럼 위장해 적들로부터 자기 존재를 숨기는 대벌레의 행위,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몸을 피하는 원숭이들의 행위, 아이콘적/인덱스적 표상을 통한 소통의 일례다.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 당신이 개에게 ‘앉아’라고 할 때, 그 말을 알아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개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소통한 것일까. 개는 언어가 가진 상징적 차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앉아’라는 발화와 뒷다리를 접어 바닥에 대는 행동의 연결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언어의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가 적힌 인덱스 카드를 기억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소통이 아닌 것은 아니며, 언어 너머 다른 표상을 통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숲은 이처럼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표상들로 연결된 세상이다. 표상 행위가 사고의 결과라고 할 때,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말할 수 있다. 숲은 생각한다.

숲이 생각한다는 결론을 한번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숲은 생각하며, 인간과 달리 인간 너머의 차원에서도 생각한다. 숲은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종은 그 사실을 지독하게 망각하고 외면하며 오늘도 제주의 비자림로에서처럼 ‘살육’을 멈출 생각이 없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