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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변동의 계급 동학> 헨리 번스타인 지음, 따비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다. 농촌 생활이 '예쁜 그림'처럼만 보여지는 듯해서 불만도 있었지만 대체로 재밌게 보았다. 그러고 시간이 좀 지나 우연히 어느 관객의 영화 감상기를 보았는데 거기 담긴 영화에 대한 지적이 또한 참 재밌었다.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다. 첫째, 영화 도입부에서 오래 비워두었다 돌아온 집 대문 옆에 쌓인 통나무 땔감의 절단면이 새하얗더라는 것. 그것은 영화의 설정과 달리 장작을 방금 패서 쌓았다는 표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날 차가운 난로에 불을 때면 연통에서 연기가 역류하기 마련인데 어째 영화에서는 연기가 하나도 안 나느냐는 지적과, 시골집을 오래 비우면 돈벌레나 거미 소굴이 되기 마련인데 거미줄 하나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지적까지. 실제 시골에 사는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깨알 지적들이라 재밌었다. 사소한 디테일만 문제 삼는 건 아니었다. 농촌 생활이라면서 땀 흘려 일하는 장면이 너무도 드물다는 지적은 참 타당하다. 영화 주인공이 맛나 보이는 음식들을 많이 해먹는데, 마트에서 장만 잘 보면 어디서든 해먹을 수 있는 그런 음식들을 보여주는 게 농촌 생활과 무슨 연결점이 있느냐는 지적도 타당하다. 결국 글쓴이는 영화를 본 소감을 "예쁜 세트장에서 찍은 예능 보고 온 기분"이라고 정리했는데 나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요컨대 영화는 농촌 생활과 농민의 삶을 낭만적으로 포장하여 보여준다. 영화가 다 그런 거지, 라는 입장도 있을 수 있겠으나 실제 농촌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입장에서는 '낭만화'에 대한 불편이 존재할 수밖에 없으리라. 글쓴이는 마침내 "(임순례) 감독님도 시골 생활 안 해봤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적는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겪어봐도 모르는 일은 많다. 오히려 겪을수록 모를 때도 있다. 이를 테면, 위의 말대로 시골에 살면 시골 생활을 아는 걸까. 시골 생활도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엄청 다양한 모습일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 안다고 할 수 없지 않을까. 한편 이런 문제도 있다. 시골 자체를 넘어 시골을 둘러싼 환경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시골을 단편적으로, 단순화해서 아는 데 그치지 않을까. 최근에 농촌과 농업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될 문고 시리즈가 출간되고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도서출판 따비가 펴내는 '따비 스터디' 시리즈다. 현재 출간된 총 세 권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읽은 책은 <농업 변동의 계급 동학>이다.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첫째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가 '농민'을 말할 때 그 농민은 누구인가? 어떤 계급인가?" 이 책은 우리가 흔히 농민을 단일한 '농민 계급'으로 여기곤 하지만, 사실은 농민 안에도 다양한 계급 구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를 테면, 다수의 임노동자를 고용해 영농을 하는 대농과 가족이 모두 달려들어 농사를 지어 겨우 먹고살 만한 소출을 내는 소농의 경우, 둘 다 '농민'으로 불릴지언정 그들의 사회경제적 계급은 다르다. 일반의 농민 중에도 다양한 계급 분화가 존재한다. 소농, 소규모 농민, 가족농 역시 따지고 보면 각각 다른 계급이다. 나아가 소농이나 가족농 안에서도 소규모 자본주의적 농민, 상대적으로 성공한 단순상품생산자, 임노동자 등의 계급 분화가 존재한다. 이처럼 똑같이 '농민'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계급이 있다는 것이 저자가 첫 번째로 강조하는 점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이유로 "농민은 '땅의 사람들'이다"와 같은 단순화한 인식을 비판한다. 농민을 '땅의 사람들' 같은 낭만화한 단일체로 파악하면 결코 '농업 변동'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농업 변동, 즉 '농업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은 농민에 대한 단일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농민 안의 다양한 계급 분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농업의 변동을 올바로 포착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이 책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화두는 급변하는 지구적 구조 및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환경 속에서 농업은 어떻게 될까, 농업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묻는 일이다. 그러면서 농업의 '복잡성'을 그려 보이려 한다. 그런데 '농민 계급 분화'와 '농업 복잡성'에 대한 연구는 무엇에 수렴하는 것일까. 마지막, 책의 결론에서 저자는 이 책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농촌에서의 계급투쟁, 그리고 농민이 주체가 되는 저항운동을 어떻게 조직할까"를 고민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 2018년 6월 14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관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의 말을 따라 생각하면 언어를 잃는 것은 존재가 머물 곳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도 언어를, 존재의 집을 상실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난민이 되면서 고향과 사랑하는 이와 모국어를 잃고 만 것이다. 네 살 때부터 헝가리어를 수월하게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는 프랑스어를 쓰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문맹의 처지가 된다. 이 상실감은 고향에서 내쫓긴 비통함 이상이다. 새로운 자리에서 그는 간절하게 읽고 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시계 공장에서 12시간씩 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낯선 언어인 프랑스어를 익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전쟁 통에서 겪은 일들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 작품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는 그의 3부작 소설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 창작은 언어를 도구로 존재의 집, 상실한 고향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는 <비밀노트>, 2부는 <타인의 증거>, 3부는 <50년간의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3부작 각각의 내용은 이어진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1부에서 독자는 전쟁 통에서 살아가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2부에서는 쌍둥이 형제와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한 남자, 루카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에서는 헤어졌던 쌍둥이 형제, 즉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비로소 다시 해후하는 내용이 그려진다. 위와 같이 설명을 하면 통일성을 지니고 일관성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 같지만 실제 이야기 속에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모순과 있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엇갈리는 대목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쌍둥이 형제는 두 사람인가, 한 몸인가?'를 의심케 하는 순간이 있다. '루카스(혹은 클라우스)가 말하는 기억들은 사실인가, 그저 노트에 꾸며 적은 이야기인가?' 역시 혼란스러워진다. 급기야 쌍둥이 형제의 존재 자체에도 의심이 생긴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과연 누구의 기억인가?' 소설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보면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있다. "이 소설에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K시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다. 작중 인물인 루카스는 나와 닮은 점이 많다. 내가 10살 때 전쟁이 끝났다. 나도 어려서 국경을 넘었다. (...) 클라우스는 나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오빠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였다."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사실이라기에는 엇갈리는 진술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존재들은 누가 누가인지 믿기 어렵게 뒤섞이는 것일까.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로서 같은 알파벳 철자에서 순서만 바뀐 이름인 것은 이들의 '존재 바꾸기'를 암시하는 것일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쓰기는 언어로써 존재의 집을 마련해가는 시도로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존재의 제자리를 끊임없이 정위(定位)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그러듯, 너와 나의 자리를 이동하며 우리의 제자리를 찾는 시도. 소설에는 그러한 '움직임'들이 가득하다. 극단적으로 차갑고 건조한 문장들 아래서 활동하는 것은 존재들의 저 치열한 움직임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 화자의 말투가 덤덤할수록 더욱 뜨겁게 읽히는 소설이다.

  • 2018년 5월 18일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이면서 무엇보다 뜨거운 사회운동가이던 존 버거는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고 많은 책을 남겼다. 그리고 구순의 나이로 작년에 타계했다. 비록 긴 세월을 살아주었지만, 흠모하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사실에서는 큰 상실감이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허전한 마음으로 그의 산문집들을 다시 찾아 읽었는데 그러다 우연히 2015년 무렵 그의 일상을 담은 영화가 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제목은 <존 버거의 사계>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지금도 영화를 찾아볼 수 있다. 90여 분 영화 중에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다. 영화의 끝 부분에 나온, 어쩌면 매우 평범한 장면이다. 존 버거가 대화 친구이자 이 영화를 제작한 틸다 스윈튼의 자녀에게 오토바이를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오토바이를 타본 적 없는 어린 친구에게 건네는 그의 조언은 간결하다. 몸에서 힘을 빼고 편하게 앉아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볼' 때 몸은 자신의 전체를 끌고 그쪽으로 기운다. 그가 알려주고자 했던 오토바이 조정하는 원리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의 신선한 '강습'을 듣고 나니 새삼 '바라본다'는 행위에 각별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것이나 바라볼 수 없다. 나는 바라보는 쪽으로 기울 테니까. <존 버거의 글로 쓴 사진>의 글들은 모두 글자로 기록한 스냅사진들 같다. 존 버거는 여기에 포토카피(글로 쓴 사진, Photocopies)라는 이름을 붙인다. 총 스물아홉 편. 각각의 짧은 글들은 모두 누군가들의 한순간을 글로 '포착'하고 있다. 존 버거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누군가에 기운다. 그 대상은 때로는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때로는 세상에 알려진 어느 인물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통성명도 없이 스쳐지나간 누군가들이다. 라코스테 스웨터를 입은 남자,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남자, 샤프카를 쓴 젊은 여인, 거리의 배우 등등. 때로 그가 바라보고 기록하는 대상은 풀밭 위의 그림, 잔에 담긴 꽃 한 묶음, 바구니 안의 고양이 두 마리가 되기도 한다. 이 기록들은 마치 셔터스피드를 길게 설정해 찍은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대상인 인물들은 찰나이되 느리게 흐른 찰나에 담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 포토카피들의 목적은 인물을 정확히 담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목적일까. '내가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중략) 나는 대상과 닮게 그리는 것이 인물화의 조건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않는다. 닮을 수도 닮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여하튼 그것은 신비로 남는다. 이를테면 사진의 경우 '닮음'이란 없다. 사진에서 그건 질문조차 되지 않는다.' 결국 정확을 떠나서 대상을 향해 질문을 하는 것, 그러면서 대상에 머무는 신비로움을 어루만지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누구나에게 머무는 신비로움. 하지만 금방 고개를 돌려버릴 때는 알아내지 못할 신비를 오래 바라보며 따라 그리는 작업. 이것이 존 버거가 시도하는 포토카피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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