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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리베카 솔닛 지음

보통은 ‘안내서’라는 말이 붙으면 ‘길 찾기 안내서’라고 해야 어울리는 법인데 이 책의 제목은 <길 잃기 안내서>이다. 책의 부제는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이 제목들로 짐작해 보면 이 책은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한 길 잃기’를 안내하는 책이리라. 더 먼 곳은 어디일까? 더 먼 곳에 이르면 무엇이 기다리는 것일까? 저자 리베카 솔닛은 <이 폐허를 응시하라>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멀고도 가까운> 등으로 이름을 알린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이다. 방금 소개처럼 그는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이기에 자연스레 그의 책들도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담은 책과 개인의 내밀한 생각을 드러내는 에세이로 나뉘는데 이 책은 에세이에 속한다. 구성이 독특하다. “1장 열린문 / 2장 먼 곳의 푸름 / 3장 데이지 화환 / 4장 먼 곳의 푸름 / 5장 방치 / 6장 먼 곳의 푸름 / 7장 두 개의 화살촉 / 8장 먼 곳의 푸름 / 9장 단층집”. 이것이 책의 목차이다. 이와 같은 구조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어느 과거로 훌쩍 떠났다가 ‘먼 곳의 푸름’이라는 제목을 가진 장으로 꾸준히 돌아온다. ‘먼 곳의 푸름’ 장에는 주로 작가가 빠져드는 ‘푸름’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수평선의 푸름, 이브 클랭의 ‘푸른색’,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에 대한 이야기 등등. 푸른색은 우울, 멜랑콜리 등을 상징하는 색으로 저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어두움을 표현하는 색이기도 하다. 훌쩍 떠났다가도 거듭 ‘푸름’으로 회귀하는 구조는, 이 이야기가 실은 ‘길을 잃지 못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떠나지만 떠나지 못하는. ‘푸름’은 작가에게 일종의 ‘집’인 것이다. 끝내 바깥에서 문을 잠그지 못하는 집. 불태우고 떠나지 못하는, 그래서 다시 문앞에 서게 되는 그런 집. 그렇다면 길을 잃은 일은 실패인가. 책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는데 ‘wander’이다. 작가는 어느 날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집어든 낡은 책에서 본 대목을 소개한다. “피트리버 원주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희한한 현상이 하나 있다. 그들은 그 현상을 ‘방랑하다(wander)’라는 영어 단어로 묘사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방랑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방랑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정신적인 압박을 받은 탓에 이전까지 익숙했던 환경에서의 삶을 갑자기 견디지 못하게 되는 일인 듯하다. 그런 사람은 방랑하기 시작한다. 목적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낡은 책의 대목은 이렇게 이어진다. “당신이 정말로 야성적인 상태가 되면, 그런 야성적인 존재들이 어쩌다 당신을 볼 수 있고 심지어 그중 하나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다. 당신이 추위에 떨며 고생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냥 당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방랑은 끝난다. 방랑하던 사람은 이제 샤먼이 된다.” 낡은 책이 알려주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닐까. 방랑하는 사람이 방랑을 끝내고 돌아오면 그는 이전과 다른 존재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재차 ‘푸름’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하지만 매번 다른 내용의 ‘푸름’으로 돌아가듯이. 같은 집으로 들어가더라도 다른 존재가 되어 돌아간다면 그것은 방랑이 이룬 성과일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이 ‘상실이 발견이 되는 순간’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길 없는 곳, 막다른 곳이 어떻게 ‘새로운 길’일 수 있는지를 역설한다. 그래서 길을 잃고 심지어 자신을 잃는 경험조차 두려워만 하지는 말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더 먼 곳이란 어디일까? 더 먼 곳에 이르면 무엇이 기다리는 것일까? 지도에서 가장 먼 곳은 지도의 끝이 아니라 지도의 바깥이 아닐까. 그런데 지도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를 바꾸는 일이라도 해볼 만하다. 다른 지도가 있는 곳은 바로 다른 세상이니까.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방법은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교훈처럼 우선 길을 잃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잃는 경험을 통해서일 것이다. 자신을 잃고서야 펼쳐지는 가능성. 얼마 전 <무명의 말들>을 낸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가 어느 인터뷰에서 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유리창의 이쪽이 밝고 저쪽이 어두우면 밝은 쪽은 나를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유리창 너머의 다른 존재를 보기 위해서는 이쪽의 불을 끄면 된다. 처음엔 깜깜하겠지만 차츰 반대쪽의 모습이 나타난다. 어떤 (사회)운동을 하려면 불을 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 나는 지금 불을 끈 채로 나를 바라보며, 나의 너머에 있는 다른 세계가 보이길 기다리고 있다.”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이 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 쉼보르스카가 쓴 서평집이다. 맞다, 시인이 쓴 서평집이다. 게다가 '비필독도서'들에 대한 서평집이다. 꼭 읽어야만 하는 이른바 '필독도서'가 아닌, 읽든 안 읽든 무방한 책들만 꺼내 읽었다고 쉼보르스카는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서평집의 제목도 <읽거나 말거나>이다. 얼마나 가뿐한가. 시인은 책 앞머리의 '저자의 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처음에는 정말 제대로 된 리뷰를 써보겠노라 결심했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리뷰를 쓸 줄 모른다는 걸, 게다가 그다지 쓰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란 내게 때로는 그 자체로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느긋하고 자유롭게 공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구실이기도 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문인답지 않게 자신은 그저 독자, 아마추어, 애호가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새롭고 산뜻한데, 책은 공상을 위한 구실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쉼보르스카는 서평을 쓰면서,아니 그 전에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느긋하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치곤 한다. 몇몇 대목을 읽어보자. 조지아 뱅드로프스카의 <아름다워지기 위한 100분의 시간>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100분을 투자하라고? 그것도 날마다? 일과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반 여성들에게는 누리기 힘든 일종의 사치다. 어쩌다 짬을 내서 시도해보려 해도 막상 이 책을 대충 훑어보고 나면 100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다음 편 글인 <동물들의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주 오래전, 학창시절의 친구였던 짚신벌레가 떠오른다. 한때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짚신벌레를 노트에 그려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짚신벌레는 나에게 따분한 대상에 불과했고, 세포분열 과정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저 분열하니까 분열하는 거라고 여겼다. 절친한 친구였던 마우고시아와 함께 크라우프의 낡은 영화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성인영화를 관람하는 게 내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쉼보르스카는 끊임없이 권위적이고 고루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필독도서'가 아닌 '비필독도서'만 찾아 읽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그는 책 읽는 행위를 지겹고 답답한 일로 만들지 않고자, 자유로운 놀이로 만들고자 애쓰는 독자이다. 그가 밝히는 소신은 이러하다. "내가 구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 (…) 이런 즐거움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단조로워질 것이며, 동시에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 책을 갖고 노는 호모 루덴스는 자유롭다. 적어도 주어진 자유를 가능한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호기심에 부합되는 주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 혹은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중생대 지층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쉼보르스카의 글에 등장하는 '자유'라는 단어에는 특별한 감각이 담긴 듯하다. 내가 쉼보르스카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택의 가능성들>처럼. 형식과 제도에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가 느껴져서 좋다. <읽거나 말거나>는 137편의 서평을 엮은 책이라 내용을 간추려 전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너무 즐겁게 읽은 책이라 꼭 소개하고 싶었다. 쉼보르스카의 글을 읽으면 '자유롭게 읽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쓰는 일'을 너무나 따라하고 싶어진다. 그는 이 서평 연재를 무려 35년간 계속했다. 자유롭게 읽고 맘대로 쓰는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눈 감을 때까지 계속했다는 점이 정말 경이롭다.

  • 2018년 9월 21일

<무지한 스승>, 자크 랑시에르 지음


아기들이 말을 배우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다. 신기하게도 처음 아기들은 문법과 어휘에 대한 지식 없이도 말을 듣고 이해할 줄 안다. 예전에 우연히 본 한 인터넷 동영상이 생각난다. 한 미국 가정에서 태어난 한두 살짜리 아기가 부모가 시키는 말을 알아듣고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부모가 사용한 말은 물론 영어다. 내가 아무리 영어를 모른대도 학교에서 영문법과 영단어를 익힌 시간으로 치면 그 아기보다 월등히 길 텐데, 내가 못 알아듣는 말을 그 아기는 알아듣는다. 문법이나 어휘에 대한 지식과 말을 알아듣는 의지나 지능이 정비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지한 스승>의 처음에도 신기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네덜란드로 망명한 학자 조제프 자코토가 겪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자코토는 망명 이후 루뱅 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문제는 학생들이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것은 당연하고, 자고토 본인이 네덜란드어를 전연 할 줄 몰랐다. 그렇다며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그는 마침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학생들에게 건네면서 이 책으로 프랑스어를 익히라고 주문한다. 가능한 일인지 모른 채 일종의 모험을 해본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의 기본조차 설명하지 않고 다만 두 언어 간의 대조가 가능한 책 한 권만을 전달했다.


이 우연한 실험의 결과는 놀라웠다. 학생들은 원래 알던 네덜란드어와 대조하며 프랑스어본을 읽으면서 프랑스어 단어와 그 단어들의 어미변화 이치를 스스로 습득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자고토가 학생들에게 그들이 읽고 생각한 바를 프랑스어로 써보라고 했을 때는 학생들이 거의 작가 수준의 글을 적어 과제로 제출했다.


자고토는 이 우연한 지적 실험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학생이 그의 고유한 지능을 쓰게 만든다면 스승은 자신이 모르는 것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 안에는 스승이라는 자들이 저지르는 중대한 오류에 대한 성찰이 숨어 있다. 스승은 자칫 '자의적인 고리 안에 지능을 가두는 자'이기 쉽다는 점이다. 가르치고 설명하는 자, 즉 앎을 지도하는 자는 제 틀 안에 학생의 지능을 가두고 만다. 실은 인간은 누구든 지능을 타고났으며, 아기가 언어처럼 삶에 필요한 기술을 처음에 어떤 '설명' 없이도 익히듯 인간은 모두 자신에게 필요한 앎을 성취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설명자'들은 간과한다는 것이다.


<무지한 스승>의 저자 랑시에르는 자고토의 경험이 전하는 교훈을 통해 현대의 '교육'이 품고 있는 잘못된 전제를 비판한다. 현대사회의 교육제도 안에는 '인간의 지능은 모두 평등하다'는 전제가 빠져 있음을 지적하고 비판한다. 현대 교육 제도는 앎의 불평등을 축소하려는 제도로서 기능하고 발달해왔다. 하지만 교육은 인간이 '평등'하다는 전제 없이 '불평등'을 문제로 다룬다. 이는 교육이 겉으로는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애쓴다'는 선의의 제도로 비춰지는 구실이 되지만, 결국 인간은 모두 평등함을 조금도 믿지 않는 제도인 탓에 민주주의와 근본적으로 어긋난다고 랑시에르는 지적하는 것이다.


조제프 자고토는 앞서의 우연한 실험을 하기 전에는, 스승이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여 학생들을 스승의 수준만큼 끌어올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즉 스승은 '설명하고 지도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험 이후 자고토는 자신의 믿음을 뒤엎는다. 이제 자고토는 설명의 원리란 '바보 만들기'의 원리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스승이 학생의 의지를 늘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킨다면, 아무리 뛰어난 내용의 교육이라도 '바보 만들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지와 지능의 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 정신의 진정한 힘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적 해방'이 필요하다. 스승이 할 일은 '설명'이 아니다. 스승은 무엇보다도 학생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리고 학생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스승 자신이 해방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배움을 위해서는 설명과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일은 자고토와 랑시에르가 말하듯 우리의 타고난 지능이 온전히 발휘되도록 '해방'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유식한 설명자보다 학생을 해방하는 무지한 스승이 '보편적 가르침'에 어울리는 스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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