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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P 연재 4화]


지난 연재 글인 ‘편집’ 편에서 저는 ‘관점의 교환’을 말하면서, 편집자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관점의 교환을 수행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적었지요. 이번 편에서는 그 이야기를 이어나가려고 합니다.

저는 디자이너가 하는 일의 핵심도 관점들을 교환하는 주체가 되는 일, 관점들이 교환되는 장소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관점 교환의 대상에 있어서는 편집자와 차이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편집자가 주로 저자 관점과 독자 관점 사이를 매개한다면 디자이너는 책의 내면의 관점과 외면의 관점 사이를 매개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면과 외면

내면 관점과 외면 관점이란 말이 무얼 뜻하고자 하는지 잠깐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내면 관점은 원고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관점을 말합니다. 즉 원고의 내용이지요.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이 책은 누구에게 말하고 싶어 하는가, 이 책은 왜 이걸 말하고 싶어 하는가. 이런 것들을 고민하여 파악하게 되는 것이 내면 관점입니다. 이 관점은 텍스트로부터 얻어집니다.


외면 관점은 책의 외모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한 관점을 말합니다. 이 책은 어떻게 보이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어떤 인상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누구의 시선에 의해 어떤 물건으로 여겨지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헐렁하고 만만해 보이고 싶은가, 아니면 철저하고 단단해 보이고 싶은가, 이 책은 어떤 두께를 가지면 좋을 것인가, 이 책은 어느 정도의 무게면 좋을 것인가. 이런 것들을 고민함으로써 해당 책의 외면 관점을 파악할 수 있겠지요. 내면 관점이 텍스트에서 얻어진다면 외면 관점은 비주얼로 구현되지요.


한편 내면과 외면을 이렇게 구분하는 일이 무척 억지스럽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람도 내면이 있고 외면이 있다지만, 사실 내면이든 외면이든 따로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요. 내면이 없으면 외면이 없고 외면이 없으면 내면이 없으니 둘은 하나인 것이지요. 책의 내면과 외면도 그렇게 하나로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둘을 분리하여 인지하는 과정도 필요해 보입니다. 분리하여 인지하되 두 관점을 다시 하나로 연결시키는 역할이 디자이너에게 주어진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관점이 합쳐질 때 이러한 연결 질문이 생겨나지요. 이 책은 무얼 말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이야기는 어떠한 외견으로 드러나면 좋을까.

다수와 관점 교환하는 현장 디자이너의 갈등

앞서 ‘책의 내면과 외면을 매개하는 디자이너’에 대해 썼는데요, 현장의 디자이너는 저러한 차원뿐만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관점 사이를 매개합니다. 다양한 관점을 매개한다는 것은 다양한 갈등에 처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디자이너는 작업물의 외면의 구현하는 담당자로서 무엇을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작업물의 내면을 담당하는 다른 주체(=작가), 그리고 작업물의 내외면 전반을 관리 감독하는 주체(=클라이언트)가 존재하며 그들과 필연적으로 협업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니 현장 디자이너는 항상 다수와 관점 교환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에 처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꽤 실감나게 보여주는 자료(?)들이 있습니다. 언젠가 멍하니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본 웹페이지들인데요, 현장 디자이너가 처하는 현실과 갈등을 무척 잘 소개하는 자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래 자료들이 꼭 ‘책 디자인’과 관련된 내용만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여러 시사점이 있으니 소개해보겠습니다.

1)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이유’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분들도 지금 검색창에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이유’라고 검색해서 해당 웹페이지를 살펴보시면 좋겠습니다.


‘섀논’과 ‘데이비드’가 주고받는 메일이 그 내용이에요. 둘이 메일을 주고받는 발단이 된 사건은 섀논과 같이 살던 고양이 ‘미시’의 실종. 미시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자 섀논이 미시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어달라면서 디자이너 친구인 데이비드에게 부탁 메일을 보낸 것이지요. 부탁을 받은 데이비드는 흔쾌히 전단지를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시를 찾는 전단지를 만들면 되는, 어찌 보면 간단한 일임에도 이 일은 기대와 달리 이상한 쪽으로 진행이 됩니다.


디자이너인 데이비드가 자꾸만 영화 포스터 같은 걸 만들어오는 게 가장 큰 문제. 게다가 클라이언트(는 아니지만 작업을 부탁한) 섀논이 요청한 적도 없는 내용을 데이비드가 임의로 전단지에 넣는 것도 문제입니다. 데이비드는 자꾸 왜 이럴까요. 비록 ‘전단지’라지만 데이비드는 창작자의 정체성과 표현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작업물의 외견을 가능한 근사하게, 더불어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완성하고 싶습니다.


결국 이 일화는 자기 고집과 욕심만 내세우며 말이 안 통하는 디자이너의 모습을 데이비드의 태도에 빗대 조롱하는 셈이지요. 실제로도 데이비드는 자기 관점에만 매몰돼 있는 모습이에요.

2) ‘우리나라 디자인이 구린 이유’

이번에 소개할 웹페이지는 ‘우리나라 디자인이 구린 이유’라고 검색하면 찾을 수 있습니다.


‘제64회 깐느 영화제 포스터’를 디자인 작업하는 설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예요. 첫 장면에 보이는 포스터 시안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검은 배경 속에서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우아하게 앉아 있는 배우의 사진이 앉혀져 있고요. 아주 가는 획으로 적힌 64라는 숫자가 포스터의 검은 공간들을 구획하며 그려져 있습니다. 세련된 느낌을 추구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이 시안을 보고 클라이언트 쪽 담당자가 회신을 보내왔습니다.


“실장님, 고생하셨고요. (...) 검정색이 칙칙하고 (...) 64 글자는 잘 안 보이고 (...) 마이너해요. (...) 아직 미완성 포스터 같습니다.”


저도 이런 식의 피드백을 많이 받아봐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습니다. 파랑색을 넣으면 파랑색이 울적해 보여서 안 된다고, 빨강색을 넣으면 빨강색이 뜨거워 보여서 안 된다고, 검정색을 넣으면 검정색이 칙칙해 보여서 안 된다고 피드백을 받는 것이죠. 그리고 글자는 굵고 선명하게 넣어야 ‘성의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 반대로 하면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흉을 듣지요.


이 말을 들은 ‘실장님’은 수정안을 작업해서 다시 보내옵니다. 칙칙한 검정 배경을 ‘화사한’ 핑크 배경으로 바꾸고, 배우의 다리는 길게 늘리고, 64 글자는 상당히 두꺼운 획으로 조정해서. 하지만 이번에도 피드백이 좋지는 않습니다.


“내부 논의 결과 반응이 안 좋네요. (...) 그냥 배우 얼굴 잘 보이게 해주시고요. 영화제 이름 잘 보이게 해주시고요. (...) 빠른 수정 부탁드립니다.”


결국 이 포스터는 클라이언트의 이런저런 요구를 수용하면서 두어 차례 수정을 더 거치게 됩니다. 그 결과 배우의 얼굴을 엄청 크게 크롭해 넣고, 포스터 하단에 영문으로 작게 적었던 ‘FESTIVAL DE CANNES’ 같은 표기는 한글로 ‘깐느영화제’라고 큼직하게 적는 것으로 고쳐지고, 여기에 심지어 “5월 당신의 감성을 충족시킬 명품 영화제가 온다”라는 문구까지 추가된 채로 ‘완성’됩니다.


앞선 두 가지 이야기 모두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디자이너가 현장에서 겪는 일들을 무척 실감하게 묘사한 셈이에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문제적인 면이 있는데, 디자이너의 일을 무척 협소하게 파악한다는 사실이 그렇습니다. 현장의 디자이너는 데이비드처럼 전적으로 자기의 고집대로만 작업할 수가 없습니다. 작업물의 용도를 저렇게 무시한 채 자신의 표현 욕심만을 채우는 작업을 할 수는 없습니다. 깐느 영화제 포스터를 작업한 실장님의 사례도 너무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끔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에 매우 지친 나머지 그냥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자동 반응 기계마냥 모든 수정사항을 원하는 대로 고칠 때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렇게 최악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은 너무 극단의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두 가지 이야기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 간 소통의 난점, 난맥들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좋은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지요. 마지막으로 좋은 디자인을 방해하는 요소를 한 가지 더 알아보겠습니다.

3)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현철×나몰라패밀리’ 편

유튜브에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현철×나몰라패밀리’ 편이라고 한번 검색해보시겠어요? KDB대우증권의 광고영상인데요. 제가 보시길 바라는 내용은 영상 시작부터 35초까지의 내용입니다. 클라이언트가 광고 음악 제작을 발주하는 회의 장면. 이 회의장에서 주고받는 말들이 의미심장합니다.


“이번에 저희가 광고 음악을 만들고 싶은데요. (...) 아주 쉽게... (...) 요즘 대세인 힙합 스타일로... (...) 노래는 임원 분들께서 트로트를 좋아합니다... (...) 아 그리고 친근하게! (...) 세련되면서! (...) 신나게! (...) 느낌적인 느낌으로 (...) 광고인 듯 광고 아닌 광고 같은? (...) 마지막으로 강조하지만 정말 쉽게...”


클라이언트들이 회의에서 이런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 결과, 놀랍게도 무척 흥이 나는 광고 음악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으로 영상은 마무리가 됩니다. 그런데 저 회의 자체를 보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작업을 발주할 때 사용하는 저 말들. 느낌적인 느낌의 말들. 저 말들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전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물론 스타일에 관해, 분위기에 관해, 작업물이 추구할 온도(?)에 관해 지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공허한 말들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중구난방이지요.


그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좋을까요. 제 생각에 작업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서로의 관점을 교환하기 위한 이야기를 충실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협업하는 여러 주체들 간의 대화(때로는 디자이너 스스로 자신이 지닌 여러 관점들을 꺼내놓고 벌이는 독백까지 포함하여)를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게 나눠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대화는 사실 아주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책의 내면과 외면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충분히 말하는 기본. 그런데 이 기본만큼 필수적이고 효과적인 건 없습니다. 이때 디자이너는 관점 교환을 통해 얻은 단서들로 책의 다면적인 정체를 파악한 후, 그 정체를 외면에 구현하는 일을 하지요. 내면 관점과 외면 관점을 오가며 이 작업을 완성하는 것이 디자이너의 일입니다.


(다음 연재에 이어집니다)

[플랫폼P 연재 3화]


이번에는 ‘편집’에 대해 글을 쓸 차례입니다.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십수 년 전 어느 출판사에서 본 입사 면접 때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두 곳의 출판사를 다니다 그만둔 4년차 편집자였고 2개월쯤 쉬다가 새 직장을 찾고 있었습니다. 제가 지원한 출판사는 이른바 ‘대형 출판사’였고, 편집자를 뽑는 과정이 제법 까다로웠습니다. 일단 서류 심사가 있었고요. 서류 심사 합격자를 대상으로 면접이 예정돼 있었습니다. 용케 서류 심사를 통과한 저는 면접을 보러 회사에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있었지요. 그날 가서 면접만 보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면접에 앞서 ‘교정교열 시험’을 치른다고 하더군요. 시험지에는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틀린 건지 정확히 짚어내기가 쉽지 않은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걸 정해진 시간 안에 매끄럽고 올바르게 고쳐야 했지요.


시험을 치른 후 잠시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아마 그사이 시험지를 채점해 그 결과로 면접 대상자를 정하는 듯했습니다. 얼마의 대기 시간이 지나고 저는 면접 대상자가 되었지요. 면접 대상자는 저와 다른 한 사람, 총 두 명인 것 같았습니다. 저희 둘은 경영진들의 방을 차례로 돌아다니면서 일대일 면접을 치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최종 면접장으로 보이는 회의실에 들어갔지요. 그곳에는 경영진 한 사람과 선임 편집자 셋이 있었습니다. 십 분 가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렇게 오래 묻는 걸 보면 나 합격 아닌가’라는 생각이 제 마음 속에서 슬며시 피어날 때였습니다. 저와 마주 보고 앉은 경영진이 제게 물었습니다.


“만약 저자가 탈고했다며 보내온 원고가 여러 모로 수준 미달이고 문장에도 문제가 많다면, 이럴 때 진규 씨는 어떻게 하겠어요?”


뭐라고 답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전에 다니던 출판사에서도 왕왕 겪던 일이고 그럴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냉큼 대답했지요.


“싸워야죠. 싸워서 고쳐야죠.”


그런데 제가 말을 마치자 여기저기서 짧은 탄식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죠. 아니나 다를까 이내 이런 꾸중 아닌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건 곤란하죠. 저자는 출판사의 가장 귀한 재산이에요. 저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요. 우리 출판사는 저자를 모시는 일을 가장 중요한 업무로 여겨요. 저자와 싸우는 건 금물이에요. 원고를 뜯어 고치더라도 저자를 정성껏 모시고 받들면서 그렇게 해야죠.”


이때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고, 미소를 띤 채 활달하게 이야기하던 면접장의 모든 사람들이 이때 이후로는 모두 말을 아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떨어졌구나’ 하고 직감했고 최종 결과도 직감한 대로였습니다. 취업 실패.

아마도 ‘저자와 싸운다’고 한 제 말이 면접관들에게 은은한 충격을 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자를 모신다고? 저자는 귀한 재산이라서 저자와는 싸울 수 없다고?’ 하면서요. 저 역시 저자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저자보다 원고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만약 원고를 모신다고 했으면 그나마 납득했을 텐데 저자를 모신다는 말은 영....” 하면서 갸웃했었지요.


지금 저때의 일을 돌아보면, 그 자리의 누구도 옳게 말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싸운다’는 제 말도 틀렸지만 ‘모신다’는 면접관의 말도 틀린 것 같습니다. 싸우는 차원이든 모시는 차원이든 둘 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지금은 가지게 되었거든요. 저는 더 근본적이며 중요한 차원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관점 교환’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자의 관점과 독자의 관점, 그리고 편집자의 관점 저는 편집자가 편집자로서 취하는 관점에 다소 묘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편집자의 관점은 저자의 관점과 다릅니다. 편집자의 관점은 독자의 관점과도 다릅니다. 그럼 편집자의 관점이란 어떤 성격에 가까운가. 제 생각에 편집자란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관점을 교환하는 주체이자 장소인 것 같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편집자의 관점이 다소 묘하게 여겨지는 것이지요.


차례대로 한번 따져볼까요. 우선 편집자의 관점은 저자의 관점과 분명 다릅니다. 저자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 전달하고 싶은 것, 그리고 이 책 출간을 통해 얻을 기회와 효과에 더욱 밀착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는 책의 영혼을 담당합니다. 책에 영혼성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은 저자에게서 기인할 테지요. 이때 편집자 역시 책의 영혼을 맡으려고 한다면? 그런 일도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제 생각에 그런 일은 무척 신중해야 할 것 같아요. 한 몸(=책)을 두 영혼이 좌지우지하는 일은, 안 될 일은 아니지만 자칫 분열과 혼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구체적으로는 이런 일이지요. 저자 입장에서 정말 쓰고 싶지 않은 내용이나 표현이 있는데, 그걸 편집자가 강요해서 쓰게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좋을까. 반대의 경우를 고민할 수도 있겠습니다. 저자 입장에서 반드시 꼭 넣고 싶은 내용이나 표현이 있는데 그걸 편집자가 강요해서 뺄 수 있을까.


저자와 편집자 사이에 입장차가 있기 때문에 위와 같은 상황은 실제로 꽤 자주 벌어집니다. 저러한 갈등 상황이 생기면 저자와 편집자는 협의를 해야 하지요. 이때 싸울 수도 있고 모실 수도 있고요. 그런데 이때 싸우든 모시든 그러한 수단보다 더 중요한 차원이 있습니다. 독자의 관점을 소외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편집자는 다름 아니라 독자 관점을 근거로 삼아 저자에게 간섭할 수 있습니다. 편집자는 편집자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독자의 관점을 ‘통해’ 저자 관점에 간섭하게 됩니다.


이를 테면, 저자가 무심코 쓴 비인간동물에 대한 부적절한 표현이 있을 때, 편집자는 저자에게 해당 표현을 고치자고 제안할 수 있습니다. 이때 저자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지요. 자신의 윤리 의식과 표현 행위에는 문제가 없다면서 수정을 거부할 수 있지요. 이때 편집자는 이러한 표현을 문제로 여기는 독자의 관점을 ‘가져와서’ 저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교환 행위처럼 말이지요. 독자의 관점을 (제대로) 수용한 저자라면 더 이상은 자기 관점만 고수하기가 어려워지겠지요. 이러한 교환들이 자꾸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겠지요. 저자의 원고 내용에 중언부언하는 부분이 많고 때로는 고루한 느낌일 때. 편집자는 역시 독자의 관점을 가져와 저자에게 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독자들이 이번 책에 바라는 게 무엇일지,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일지, 어떤 내용과 정서일지를 독자 관점에서 고민해서 알려줘야 합니다. 저자의 마음가짐이나 방향 설정 등에 문제가 있다면 독자 관점을 알려주어서 이를 고치게 하는 것이지요. 이때도 편집자는 관점 교환을 일으키는 주체이자 관점 교환이 벌어지는 장소처럼 기능합니다.


편집은 매우 단순하게 한정하면 ‘교정교열윤문’의 업무이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시시각각으로) 방향을 정해나가는 기획 업무이기도 하고, 근본적으로 따지면, 여러 행위자들의 관점을 교환하는 장소를 만들고 운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장소가 제 역할을 하며 잘 운용될 때 비로소 쓴 사람도, 만든 사람도, 읽는 사람도 흡족한 책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이러한 차원을 가장 신경 쓰는 사람이 바로 편집자입니다.

한 권의 책을 위한 법 집행

또한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을 위한 법을 집행하기도 합니다. 이때 편집자는 경계가 유동적인 장소의 느낌이 아니라 냉철하고 단호한 집행관의 모습이지요. 그 법들이란 ‘한글 맞춤법’을 비롯해 ‘표준어 규정’과 ‘외래어 표기법’ 등입니다. 이러한 한국어 어문 규범을 지키면서 원고를 다듬는 것이 편집자의 주요한 업무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재밌는 것은, 한국어 규범 중에 원칙을 제시하는 동시에 원칙의 변형을 ‘허용’하는 규범이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보조 용언은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하되, 경우에 따라 붙여 씀도 허용한다”는 원칙이 있지요. 그래서 본용언과 보조용언 사이는 띄어 써도 되고 붙여 써도 됩니다. ‘그릇을 깨뜨려버렸다’로 써도 맞고 ‘그릇을 깨뜨려 버렸다’로 써도 맞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지요. 전자도 가능하고 후자도 가능하지만, 한 원고 안에서만큼은 동일한 법이 집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용언과 보조용언을 붙여 쓰기로 정했다면 원고 내내 붙여 써야 합니다. ‘그릇을 깨뜨려버렸다. 컵은 던져 버렸다’라고 쓰면 잘못된 것이지요. 보조용언을 붙이기로 했다면 컵도 ‘던져버려’야 하지요.


법 집행에는 늘 합리적인 이유가 따라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든 혼란과 반발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붙여 쓸지 띄어 쓸지를 정할 때도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겠죠. 해당 원고가 자꾸만 멈춰 서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산책처럼 읽히기를 바란다면 본용언과 보조용언을 띄어 쓰는 것이 어울릴 테죠. 반대로 원고가 거침없이 읽히기를 바란다면 붙여 쓰는 것이 어울릴 것입니다. 또한 워낙 원고 분량이 많고 이해가 쉽지 않은 내용이라 표현을 모두 최대한 간결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해야겠다고 판단한다면, 이럴 때도 붙여 쓰는 게 좋겠지요.


이러한 합당한 근거가 정해졌다면, 이를 통해 더 다양한 세부 사항들을 정해나갈 수 있습니다. ‘간결, 정확, 효율’을 위해 본용언과 보조용언을 모두 붙여 쓰기로 정했는데, 원고의 어미가 모두 ‘하였다’, ‘되었다’ 등으로 돼 있다면 어찌 해야 할까요. 저는 이런 경우 해당 원고는 간결하게 다듬는다는, 앞서 정한 대원칙에 따라 ‘했다’, ‘됐다’로 고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럴 때 저자의 반발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은 오래 전부터 ‘하였다’로 써왔기에 ‘했다’로 바꾸면 ‘어색’한 느낌이 든다고 반대하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를 확장하면 ‘하지요’라고 쓰인 곳은 모두 ‘하죠’로, ‘것이’라고 쓰인 건 ‘게’로 줄여 써야 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본용언과 보조용언을 붙여 썼다고 해서 원고 내 모든 표현을 할 수 있는 한 줄여 쓰는 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억지겠지요. 때문에 모든 사항을 기계적으로 고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집행관으로서 편집자는 자신이 해당 원고 내에서 어떤 원칙을 적용시켜왔는지 만큼은 분명히 밝힐 수 있어야 합니다. 띄어 쓴 것과 붙여 쓴 것과 줄여 쓴 것과 안 줄여 쓴 것의 기준을 최소한 스스로는 알고 있어야 하지요. 그래야 한 원고 안에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편집자는 원고마다의 법을 제정하고 집행합니다.


정리하면, 편집자의 일은 저자와 독자 간 관점을 교환하는 주체이자 교환이 이뤄지는 장소가 되는 일이고, 원고마다의 특성에 따라 규범을 제정하고 집행해나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특히 관점을 교환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는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디자인’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플랫폼P 연재 1화]


안녕하세요. 충복 옥천에 살면서 포도밭출판사를 운영하는 최진규입니다. 소규모 출판을 시작하는 분들을 위해 출판 일의 전반적인 과정을 소개하고, 운영에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8회에 걸쳐 다음 주제들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소규모 출판의 이해 / 기획 / 편집 / 디자인 / 제작 / 마케팅 / 유통 / 협업. 이번 글에서는 ‘소규모 출판의 이해’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왜 출판을 하는가

소제목이 너무 거창한데요. 실은 저 자신에게 던져보는 질문입니다. 나는 왜 책을 만들까. 이번 기회에 새삼스레 고민해보는데, 언제나 그렇듯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뭐라고 답하실지 무척 궁금하네요.

다양한 답이 가능하겠지요. 몇 가지 상상해서 적어보면 이런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 참여하기 위해서 / 저항하기 위해서 / 자본을 얻기 위해서 / 명예를 얻기 위해서 / 아름답고 훌륭한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서 / 자기를 보호할 은신처 혹은 방패를 가지기 위해서 / 재미를 위해서 등등.

이런 것도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저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출판을 시작했는데, 과연 출판이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가장 적당한가. 초면(?)에 이런 걸 되묻자고 하는 게 너무 맹랑하지요? 지금 저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감히’ 권하는 까닭은, 이러한 자문을 자꾸 해야만 자기 색깔을 가진 출판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자기 색깔을 가지는 것이 소규모 출판사에게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왜 그러한지를 설득력이 있게 밝히는 것이 이번 글의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소규모 출판’이란

우선 ‘소규모 출판’이라는 표현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이 표현을 의아하게 여길 분도 계실 듯합니다. 출판이면 출판이지 왜 굳이 ‘소규모 출판’이라고 부를까. 출판업 내에 ‘소규모 출판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당연히 소규모 출판업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왜 이런 구별이 생겨났을까요. 뿐만 아니라 소규모 출판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쓰이는 말도 많습니다. ‘1인 출판’ ‘독립 출판’ 등의 표현이 있지요.

1인 출판이라는 말은, 원래는 작은 규모의 출판사 활동을 두루두루 일컫는 범용 표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같은 정부 지원 사업 선정 시에 1인 출판사 우대가 시행되면서 1인 출판사 인정 요건이 구체적으로 정해졌지요. 현재는 대표 외에 노동자 2인 이내인 출판사를 ‘1인 출판사’로 보고 있습니다.

독립 출판이라는 말은, 책을 출판할 때 ISBN을 발부하지 않고 만들어서 주로 독립서점에만 유통하거나 자체 유통하는 출판 형태를 지칭할 때 주로 쓰입니다. 그러나 역시 ‘작은 규모의 출판’을 두루두루 일컫는 말로도 쓰이지요. 이런 식으로 소규모 출판 / 1인 출판 / 독립 출판 등의 표현은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혼재가 지금 어떠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두어도 문제는 없겠지요. 다만 ‘소규모 출판’이라는 표현은 특정 용례를 가진 ‘1인 출판’이나 ‘독립 출판’이라는 말과 비교하더라도 무척 모호한 말이긴 합니다. 그저 규모가 작은 출판사의 활동을 일컫는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규모가 작은 출판사의 일은 규모가 큰 출판사의 일과 무엇이 다른가를 생각해봐야 하는데요. 사실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습니다. 소규모 출판이 하는 일도 대규모 출판이 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책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고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일반단행본을 펴내는 출판사 중에서 종사자수가 1~2인인 초소규모 출판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무려 52.4%나 됩니다. 종사자수 5인 미만 출판사의 비율은 전체의 71.8%에 달하고요. 그러니 어쩌면 ‘다수’인 소규모 출판을 그냥 ‘출판’이라고 부르고, 규모 있는 출판사의 활동을 특별히 ‘대규모 출판’이라고 부르는 게 오히려 어울릴 수도 있는 상황이지요. 우선은 이런 현황을 알고 넘어가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겠습니다.

구글 지도를 확대하듯

지도 앱에서 특정 지역을 자세히 보고 싶으면 배율을 높여 초점을 맞춘 곳을 확대해서 보지요. 거의 대기권 높이에서부터 뷰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소규모 출판이 무언지를 파악하기 위해 이번에는 지도 앱에서 배율을 높여가는 방식을 따라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매우 큰 범주를 파악한 다음 배율을 점차 높여 특정 범주에 이르는 것이지요. ‘콘텐츠 산업’이라는 큰 범주의 산업 통계에서 시작해 ‘일반서적출판업’의 산업 통계에 이르는 방식으로 진행해보겠습니다.

<2021 기준 콘텐츠 산업 조사>에 따르면, 출판 / 만화 / 음악 / 영화 / 게임 / 애니메이션 / 방송 / 광고 / 캐릭터 / 지식정보 / 콘텐츠솔루션 등등의 산업을 포괄하는 ‘콘텐츠 산업’은 2021년 기준 137조가량의 매출을 기록했고, 61만여 명의 종사자가 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그중 ‘출판’ 부문은 24조가량의 매출을 기록했고, 17만 명가량의 종사자가 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때 출판 부문에는 다음 업종들이 포함됩니다. 출판업 / 인쇄업 / 출판 도소매업 / 온라인 출판 유통업 / 출판 임대업 등입니다. 24조 매출이란 이 다섯 업종의 매출을 합한 것이지요.

계속 배율을 높여볼까요. 다섯 업종 중에서 출판업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출판업 내에는 다음의 업종들이 포함됩니다. 일반서적출판업(종이매체출판업) / 교과서 및 학습서적 출판업 / 인터넷 모바일 전자출판제작업 / 신문 발행업 / 잡지 및 정기간행물 발행업 / 정기 광고간행물 발행업 / 기타 인쇄물 출판업 등입니다. 단행본을 기획 편집해서 펴내는 우리들은 이중 ‘일반서적출판업’ 분류에 속합니다.

일반서적출판업은 어떠한 숫자로 표현될까요. 일반서적출판업의 2021년 기준 매출액은 2조 4천억가량. 종사자수는 17,483명. 사업체 수는 6,538곳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우리가 선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1만 7천여 명의 노동자가 6천5백여 개 회사에 소속돼 일하며 연간 2조 4천억가량의 매출을 만드는 곳. 업체당 평균 매출액은 3억 7천3백만 원가량이고, 1인당 평균 매출액은 1억 3천9백만 원으로 계산됩니다. 참고로 저는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한 번도 개인 매출이 1억 3천만 원에 접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계산 값이 의아하긴 합니다. 하지만 평균이 이렇다는 거니까, (내가 아닌) 누군가는 맞은편에서 상당히 높은 매출을 올렸다고 믿는 수밖에 없겠지요.

약간의 씁쓸함을 뒤로 하고 자료 하나를 더 살펴볼까요. 앞서도 잠깐 언급했는데요. 일반단행본을 펴내는 출판사 중 소규모 출판사의 비율에 관한 자료입니다. <2021 출판산업 실태조사>를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일반단행본 출판사 중 종사자가 5인 미만인 사업체 비율은 71.8%, 종사자가 1~2인인 사업체 비율은 52.4%로 조사되었습니다. 일반단행본 출판업 외에 학술서, 수험서, 교과서, 학습지 출판업을 다 포함한 집계를 보아도, 5인 미만 사업체 비율은 69%, 1~2인 사업체 비율은 48.8%입니다.

앞서 몇 가지 통계 조사 보고서 내용을 섞어가며 적었는데요, 지금 이 지면에서는 정확한 수치를 따진다기보다는 (조사마다 표본 추출 틀이 달라 결과 값에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위치를 대략 조망하기 위한 기초 자료로서 언급했다는 점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제 배율을 끝까지 높인 결과를 한번 정리해볼까요. 우리는 매출 137조 규모 콘텐츠 산업 중 매출 24조 규모인 출판 부문 중 매출 2조 4천억 규모의 일반서적출판업계에 속하면서 1만 7천 명의 노동자와 함께 일하는 것이지요. 이 업계에는 6천여 개의 사업체가 있고요. 일반단행본 출판사 중 1~2인이 일하는 출판사 비율은 절반 남짓. 우리는 바로 이곳에 자리를 틀고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소규모’라는 딱지가 붙었지만, 사실 우리 업계에서는 우리가 표준(일반적이거나 평균적인 것)에 가깝습니다.

시작하기는 쉽지만

잠깐 딴 얘기인데요. ‘독서인구’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번에 통계 자료를 보다가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1년 동안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을 ‘독서인구’라고 부르더군요. <2021 출판시장 통계>를 보면 성인 독서인구가 47.5%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즉 한국에서 만 19세 이상인 사람 중 1년에 책을 1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이 47.5%라는 것이지요. 이는 과거에 비해 큰 폭으로 줄어드는 추세에 있습니다.

한편 인상적인 사실은, 독서인구는 줄고 있으나 신간 발행은 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소비는 줄어드는데 생산은 늘어난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지요.

출판사는 창업하기가 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싼 임대료 내는 점포를 굳이 얻지 않아도 무방하고, 직원 없이 대표자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는 선택지가 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창업 절차도 무척 쉽습니다. 구청에 출판사 신고하고, 세무서에 사업자등록하면 출판사가 설립됩니다. 그다음에는 원고를 다듬어 책으로 만들고, 제작 마친 책을 서점에 납품하면 되지요.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어느 업종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만) 사업을 오래 잘 영위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업을 오래 잘 영위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는 것이지요. 사세를 키우는 것.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 단행본 출판시장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기에는 부적당한 면이 있습니다. 속된 말로 판이 작기 때문입니다. 판이 작다는 표현이 자조적으로 들릴까 봐 염려되네요. 자조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판이 작다는 것을 결코 한계나 약점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다만 특성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직시해야 하는 현실 문제가 있습니다. 독서인구는 계속 줄고 있고 시장 내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양상입니다. 그럼 어떤 수를 찾아야 할까요.

출판에 자기 방식을 담기

어떤 수를 찾아야 할까요. 이렇게 적기는 했으나 제가 이 거대한 질문의 답을 알 리 없습니다. 다만 몇 가지 드는 생각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산업 전반의 환경과 제도를 보다 건강하고 튼튼하게 하려는 자구의 노력이 항상 필요할 테고요. 각자의 자리로 돌아와서 생각할 것은, 역시나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책을 만드는 자기 나름의 이유. 왜 책을 만드는지에 관한 자신만의 대답. 이를 곱씹으면서 출판에 자기 방식을 담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비단 더 가치 있는 태도가 무언지 따지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저는 오히려 실용적인 차원에서 이러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출판사마다 자기다운 색깔을 내면서 독자를 만들어온 역사에 의해 바로 지금의 소규모 출판 생태계가 만들어진 듯합니다. 이 생태계가 다시금 소규모 출판사의 진입과 영위를 돕는 것 같고요. 이러한 관점에서 앞으로 이어질 연재에서 보다 다양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최진규│충북 옥천의 소규모 출판사인 포도밭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일을 한다. 북디자이너로도 일한다. 학교에서 편집과 디자인을 강의한다. 책방무사 멤버십이다. 어떤출판연구회 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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