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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읽고 맘대로 쓰기

  • 작성자 사진: 진규 최
    진규 최
  • 2018년 10월 18일
  • 2분 분량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읽거나 말거나>,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이 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 쉼보르스카가 쓴 서평집이다. 맞다, 시인이 쓴 서평집이다. 게다가 '비필독도서'들에 대한 서평집이다. 꼭 읽어야만 하는 이른바 '필독도서'가 아닌, 읽든 안 읽든 무방한 책들만 꺼내 읽었다고 쉼보르스카는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서평집의 제목도 <읽거나 말거나>이다. 얼마나 가뿐한가. 시인은 책 앞머리의 '저자의 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처음에는 정말 제대로 된 리뷰를 써보겠노라 결심했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리뷰를 쓸 줄 모른다는 걸, 게다가 그다지 쓰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본질적으로 나는 독자로, 아마추어로, 그리고 뭔가의 가치를 끊임없이 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단순한 애호가로 머물길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이란 내게 때로는 그 자체로 삶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느긋하고 자유롭게 공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구실이기도 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문인답지 않게 자신은 그저 독자, 아마추어, 애호가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새롭고 산뜻한데, 책은 공상을 위한 구실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쉼보르스카는 서평을 쓰면서,아니 그 전에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느긋하고 자유로운 공상을 펼치곤 한다. 몇몇 대목을 읽어보자. 조지아 뱅드로프스카의 <아름다워지기 위한 100분의 시간>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서평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100분을 투자하라고? 그것도 날마다? 일과 가사와 육아를 병행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반 여성들에게는 누리기 힘든 일종의 사치다. 어쩌다 짬을 내서 시도해보려 해도 막상 이 책을 대충 훑어보고 나면 100분의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다음 편 글인 <동물들의 어린 시절>이라는 책에 대한 서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주 오래전, 학창시절의 친구였던 짚신벌레가 떠오른다. 한때는 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짚신벌레를 노트에 그려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짚신벌레는 나에게 따분한 대상에 불과했고, 세포분열 과정도 딱히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저 분열하니까 분열하는 거라고 여겼다. 절친한 친구였던 마우고시아와 함께 크라우프의 낡은 영화관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성인영화를 관람하는 게 내게는 훨씬 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쉼보르스카는 끊임없이 권위적이고 고루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자 한다. '필독도서'가 아닌 '비필독도서'만 찾아 읽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그는 책 읽는 행위를 지겹고 답답한 일로 만들지 않고자, 자유로운 놀이로 만들고자 애쓰는 독자이다. 그가 밝히는 소신은 이러하다. "내가 구식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멋진 유희라고 생각한다. (…) 이런 즐거움들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상상도 못 할 만큼 단조로워질 것이며, 동시에 개별적으로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 것이다. (…) 책을 갖고 노는 호모 루덴스는 자유롭다. 적어도 주어진 자유를 가능한 한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스스로 게임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의 고유한 호기심에 부합되는 주제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독서는 다른 어떤 놀이들도 제공하지 못하는 자유, 즉 남의 말을 마음껏 엿들을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해준다. 혹은 아주 잠시 동안이지만 중생대 지층 속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쉼보르스카의 글에 등장하는 '자유'라는 단어에는 특별한 감각이 담긴 듯하다. 내가 쉼보르스카의 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택의 가능성들>처럼. 형식과 제도에 스스로를 구속하지 않는 자유가 느껴져서 좋다. <읽거나 말거나>는 137편의 서평을 엮은 책이라 내용을 간추려 전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너무 즐겁게 읽은 책이라 꼭 소개하고 싶었다. 쉼보르스카의 글을 읽으면 '자유롭게 읽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쓰는 일'을 너무나 따라하고 싶어진다. 그는 이 서평 연재를 무려 35년간 계속했다. 자유롭게 읽고 맘대로 쓰는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눈 감을 때까지 계속했다는 점이 정말 경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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