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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 찾기

  • 작성자 사진: 진규 최
    진규 최
  • 2018년 6월 14일
  • 2분 분량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언어관에 따르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의 말을 따라 생각하면 언어를 잃는 것은 존재가 머물 곳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에게도 언어를, 존재의 집을 상실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난민이 되면서 고향과 사랑하는 이와 모국어를 잃고 만 것이다. 네 살 때부터 헝가리어를 수월하게 읽고 쓸 줄 알았던 그는 프랑스어를 쓰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문맹의 처지가 된다. 이 상실감은 고향에서 내쫓긴 비통함 이상이다. 새로운 자리에서 그는 간절하게 읽고 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시계 공장에서 12시간씩 일을 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낯선 언어인 프랑스어를 익혀 자신이 어린 시절에 전쟁 통에서 겪은 일들을 소재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 작품들이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있는 그의 3부작 소설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 창작은 언어를 도구로 존재의 집, 상실한 고향을 다시 일으키려는 시도로도 읽힌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1부는 <비밀노트>, 2부는 <타인의 증거>, 3부는 <50년간의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3부작 각각의 내용은 이어진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1부에서 독자는 전쟁 통에서 살아가는 쌍둥이 형제의 이야기를 읽게 된다. 2부에서는 쌍둥이 형제와 떨어져 혼자 살아가는 한 남자, 루카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에서는 헤어졌던 쌍둥이 형제, 즉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비로소 다시 해후하는 내용이 그려진다. 위와 같이 설명을 하면 통일성을 지니고 일관성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 같지만 실제 이야기 속에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모순과 있는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엇갈리는 대목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독자는 혼란을 겪게 된다. 이를 테면 '쌍둥이 형제는 두 사람인가, 한 몸인가?'를 의심케 하는 순간이 있다. '루카스(혹은 클라우스)가 말하는 기억들은 사실인가, 그저 노트에 꾸며 적은 이야기인가?' 역시 혼란스러워진다. 급기야 쌍둥이 형제의 존재 자체에도 의심이 생긴다. '이 소설 속 이야기들은 과연 누구의 기억인가?' 소설 말미에 실린 역자 후기를 보면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있다. "이 소설에는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K시는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쾨세그다. 작중 인물인 루카스는 나와 닮은 점이 많다. 내가 10살 때 전쟁이 끝났다. 나도 어려서 국경을 넘었다. (...) 클라우스는 나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오빠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함께였다." 자전적인 이야기임에도 사실이라기에는 엇갈리는 진술이 많은 까닭은 무엇일까. 왜 존재들은 누가 누가인지 믿기 어렵게 뒤섞이는 것일까. 쌍둥이 형제의 이름이 루카스(lucas)와 클라우스(claus)로서 같은 알파벳 철자에서 순서만 바뀐 이름인 것은 이들의 '존재 바꾸기'를 암시하는 것일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쓰기는 언어로써 존재의 집을 마련해가는 시도로 바라볼 수 있다. 한편 존재의 제자리를 끊임없이 정위(定位)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루카스와 클라우스가 그러듯, 너와 나의 자리를 이동하며 우리의 제자리를 찾는 시도. 소설에는 그러한 '움직임'들이 가득하다. 극단적으로 차갑고 건조한 문장들 아래서 활동하는 것은 존재들의 저 치열한 움직임이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 화자의 말투가 덤덤할수록 더욱 뜨겁게 읽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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