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대집행’을 바라보며
- 진규 최

- 2016년 5월 27일
- 2분 분량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지음
나무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더 이상 나무가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 이외의 다른 무엇이 되려고 발버둥 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며 행복이다.
위 구절은 헤르만 헤세가 남긴 말이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엽서에 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짧은 구절이지만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듯했다. 내가 '발버둥 치는'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헤세의 글귀에서 말미암은 몇 가지 단상이 마음에 길게 남았다. 나무가 되고 싶다면 그 소망 자체에 갇혀 발버둥 치기보다는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우라는 전언이 특히 그랬다. 고향과 행복에 대한 말도 인상적이다. 다른 무엇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아는 어떤 존재는 스스로 고향이 되고, 스스로 고향이 되는 존재감은 행복하다.
저 글귀는 한편으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전언이 아닌가 싶다. 모든 존재감에는 시간과 공간이 스며있다. 그런데 나무에 귀 기울일 시간이 없고, 고향처럼 자리 잡은 공간이 없는 존재는, 제 근원을 찾아 헤매며 발버둥 치는 게 아닐까.
영국 작가 존 버거가 쓴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은 첫째로 '시간'에 대해, 둘째로 '공간'에 대해 말하는 책이다. 책머리에 아예 이렇게 적혀 있다. "1부는 시간, 2부는 공간에 대한 것이다." 단상이라고 할 만큼 짧은 에세이들이 엮어져 있는데, 글마다의 밀도가 높아서 꼭 짧은 글이 아닌 것처럼 읽힌다.
존 버거는 현대인들을 근원적인 시공간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바라본다. 근대의 산업화와 자본주의 흐름은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시간관을 통해 인간을 '시간'으로부터 분리시켰다. 누구나 지금 '시각'은 정확히 알지만 인간과 해질녘의 관계, 인간과 계절의 관계는 상당히 무너졌다. 그리고 시간은 바로 순환이라는 인식은 현대에 거의 희박해졌다.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집'에 대한 해석이다. 버거에 따르면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이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집'의 근원은 지리가 아닌 존재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래서 집에서 떠나는 일, 즉 '이주'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이주는 무언가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것, 낯선 사람들 가운데 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의 의미 자체를 해체하고, 최악의 경우 어리석은 허구에 자신을 방기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 이주는 항상 세상의 중심을 뒤엎는다. 또한 인간들을 방향 잃고 상실된 파편들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이주는 당연히 제 뜻과 필요에 따라 행하는 '이사'와 다르다.
제 뜻이 아닌 이주, 특히 타의에 의해 집으로부터 뿌리 뽑히는 이주의 경우는 그래서 '죽음'과도 마찬가지다. 현대의 용어 중에 이런 식의 이주를 일컫는 말은 바로 밀양에서, 강정에서, 만덕동에서, 또 지금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에서 벌어지는 '행정대집행'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은 지리뿐만 아니라 존재를 파괴하는 일, 즉 살해나 마찬가지다. 더는 없어야 할 행정대집행이라는 폭력, 그것이 행해지는 주된 이유는 '개발'과 '공사'다.
옥천에도 공사 현장이 정말 많다. 대개는 아파트가 세워질 자리다. 그 터를 가만 바라볼 때면 '고향'을 무너뜨리고 '아파트'가 되고 싶어 발버둥 치는 것이 우리 모습인 듯싶어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