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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이 가능할까

  • 작성자 사진: 진규 최
    진규 최
  • 2018년 3월 30일
  • 2분 분량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지음


이십여 년 전,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을 떠나와 자취를 시작했는데, 집에서 받는 용돈 조금과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번 돈을 합쳐도 생활비가 항상 부족했다. 두 다리를 죽 펴고 눕지도 못하는 고시원 방에 살았는데 그 방 하나의 월세가 당시 16만 원이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이 10만 원,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이 30만 원. 총 40만 원 수입 중 4할이 집세였던 셈이다. 그때 '돈을 얼마나 벌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자주 했다. 이십 대 중반,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조금 나은 집을 구해서 살기 시작했다. 다세대 주택의 옥탑이었는데 보증금 500에 월 30이 집세였다. 작은 출판사에 들어간 내가 받은 초봉이 월 100만 원 남짓. 이제 집세 비중이 3할 정도로 내려가기는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돈 쓸 곳도 늘었다. 밖에서 밥 사먹을 일도 많고, 옷도 몇 벌은 갖춰야 하고, 이따금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술을 마시거나 마음속에만 저장해뒀던 쇼핑 목록의 물건을 지르기도 하고. 집세와 카드 값이 스쳐지나가고 나면 또다시 궁핍을 마주했다. 꼬박꼬박 돈을 벌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든 걸 알았다. 그럼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벌어들여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돈 걱정과 가난에서 벗어날 생각을 떨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제목에 적힌 '자급의 삶'이라는 말이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할까? 혹시 자급에 성공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이 책은 '자급 관점'에 대한 책이다. 기존에 우리가 살림살이를 생각할 때 흔히 '돈'의 관점, 즉 소비 생활을 영위하는 수입의 관점에서 바라봤다면, 이 책은 이를 돌이켜 '자급'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라고 권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얼마나 벌고 있는가' 같은 기준이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의 필요를 제 힘으로 마련해나가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삶의 문제를 따져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관점을 바꿔서 따져보면 여러 문제들이 새로 보이게 된다. 먼저,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를 물어보자. 문명화일까? 지식의 향상일까? 기술의 발달일까? 저자들은 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은 '착취'라고 말한다. 가정의 여성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고, 제3세계를 착취한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소위 '발전'을 거두었다.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 마리아 미즈·베로니카 벤홀트-톰젠 지음'가정의 여성을 착취'한다는 것을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다.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 노동자와 가사 노동자를 분업화했고, 가부장적 논리와 다름없는 논리로 임금 노동자의 자리를 주로 남성들이 차지하게 했다. 그로 인해 여성들은 가정 일을 도맡으며 남성 임금 노동자를 보조하는 역할에 묶여 '착취'당한다. 이때 여성은 마치 '자연 자원'처럼, '무제한적'으로 착취당한다고 저자들은 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는 단선적 착취로 그치지 않는다. 남녀불문 산업화된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때로 제1세계 여성이 제3세계 여성을 착취하는 일도 일어난다. 자본주의 체제의 회로가 폭력적인 구조로 돼 있는 탓이다. 누군가 무언가를 얻을 때 시소의 저편에 있는 누군가는 꼭 무언가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 구조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정점에는 바로 전쟁이 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자본주의 발전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대규모 전쟁을 통해 몸집을 불려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의 질문, '자급의 삶이 정말 가능한가?', '자급에 성공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 책은 자급의 가치와 자급의 필요를 일깨운다. 자급은 누군가를 착취하는 폭력에서 멀어지려는 실천이다. 실천이란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자급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훨씬 풍요로운 시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저자들은 책 속의 여러 사례들로써 설득한다. 그러니 의지를 '돈벌이'에서 '자급' 쪽으로 조금씩 틀다 보면 언젠가는 자급의 삶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급에 성공하면 과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책 어딘가에서 '삶에서 해방되려 하지 말고, 삶을 해방으로 만들라'는 요지로 말한 바 있다. 아마도 가난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듯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가난을 즐겁고 풍요로운 것으로 만들라고 말이다. 자급 관점에 따르면, 가난에서 벗어날 길은 '더 많은 돈'이 아닌 '돈에서 해방되어 자급의 길을 마련하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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