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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각한다, 인간과 달리

  • 작성자 사진: 진규 최
    진규 최
  • 2019년 5월 31일
  • 2분 분량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프랑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말년에 자신이 진정 연구하고픈 주제는 “인간 없는 세상에 관한 인류학”이라고 했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 연구야말로 인류학이 야심을 품고 연구할 만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는데 실로 궁금하긴 하다. 인간 없는 세상은 어떻게 전개될까. 그리고 인간들이 사라진 ‘인류’에는 어떤 구성원들이 있을까. 잠깐, 그런데 인간 없이도 ‘인류’가 구성될 수 있는 것인가.

‘인간’을 두 발로 걷으며 도구를 쓰고 언어로 소통하고 사회 시스템 안에서 생산과 소비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생각해보면 인간 입장에서의 규정일 뿐이다. 동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닫힌 상상력에서 조금만 벗어나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것은, 동물 입장에서는 자신이 ‘인간’이다.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직역하면 ‘고기’]로 여기고 공격한다고.” - <숲은 생각한다>, 11쪽

아마존 강 유역에서 4년간의 현장연구를 통해 집필한 <숲은 생각한다>는 인간 의식에 깊이 뿌리박힌 ‘인간 중심적 사고’에 도전하는 인류학 저작이다. 위의 인용은 서문 첫머리에 적힌 일화인데 아마존 숲에 사는 존재들(원주민 후아니쿠와 재규어)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재규어는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다. 만약 반듯이 누워 있던 인간이 재규어 자신을 빤히 응시한다면 재규어는 인간을 ‘너’로 인식하고 가만히 놓아두지만, 엎드려 자는 인간은 먹기 좋은 고기로 여긴다는 뜻이니까. 원주민들은 이를 경험으로 알았을 것이고, 이러한 관찰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인간은 누구인가라는 점이다. 재규어와 인간이 숲에서 마주쳐서 살벌한 눈빛을 부딪칠 때, 고기(인간)을 보며 ‘너는 (나처럼) 인간인가, 고기인가’라고 묻고 판단하는 존재는 누구인가. 바로 재규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이렇게 인간 중심적 사고틀의 맹점을 재고하고, 인식을 인간 너머로 확장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제시한다. 저자 에두아르도 콘의 결론은 존재 중에 ‘비인간’은 없으며, 모든 존재가 자기 내적인 맥락에서 ‘인간’이라는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진 숲도 마찬가지. 그는 이 주장의 근거로 인간적인 것 너머의 ‘표상’을 탐구한다.

표상 행위란 모든 사고의 기초를 형성하는 작동이다. 소통의 도구가 ‘언어’라고만 생각하는 것 역시 인간 중심적 사고이다. 말과 글로 매개하는 소통은 ‘언어적 표상’의 결과일 뿐, 세상에 존재하는 기호 작용은 ‘언어적 표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책에서 제시하는 예로는, 아이콘적 표상,인덱스적 표상이 있다. 언어 같은 상징의 차원만이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콘(표상하는 사물과 유사성을 공유하는 기호), 인덱스(표상하는 사물에 영향을 받거나, 상관관계가 있는 기호)를 통해서도 존재들은 정보를 주고받는다.

나뭇가지처럼 위장해 적들로부터 자기 존재를 숨기는 대벌레의 행위,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 몸을 피하는 원숭이들의 행위, 아이콘적/인덱스적 표상을 통한 소통의 일례다. 이런 설명도 가능하다. 당신이 개에게 ‘앉아’라고 할 때, 그 말을 알아듣고 행동으로 옮기는 개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소통한 것일까. 개는 언어가 가진 상징적 차원을 알아들은 것이 아니다. ‘앉아’라는 발화와 뒷다리를 접어 바닥에 대는 행동의 연결을 기억해내는 것이다. 언어의 상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앉아’가 적힌 인덱스 카드를 기억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소통이 아닌 것은 아니며, 언어 너머 다른 표상을 통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숲은 이처럼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표상들로 연결된 세상이다. 표상 행위가 사고의 결과라고 할 때,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말할 수 있다. 숲은 생각한다.

숲이 생각한다는 결론을 한번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숲은 생각하며, 인간과 달리 인간 너머의 차원에서도 생각한다. 숲은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종은 그 사실을 지독하게 망각하고 외면하며 오늘도 제주의 비자림로에서처럼 ‘살육’을 멈출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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